단 하나의 육체와도 같은 아름다운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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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에는 아마도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책의 장정이 아름다운, 내용을 읽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책이 있는가 하면 책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 아름다운 경우가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은 후자의 의미에 걸맞은 아름다운 책이다. 키냐르의 군살 하나 없이 ‘잘빠진’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를 훔쳐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여기저기 쓸모 없는 근육을 덧붙인 것도 아니고 그저 미끈할 뿐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우리는 단 한 번만 사랑한다. 그리고 이 단 한 번의 사랑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13쪽)

“누가 암시해주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느꼈으므로, 느낌을 표현하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그때 사랑이 시작된다. 언어가, 손이, 성기가, 입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깝게 타인에게 다가간다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302쪽)

섣부른 수사도 과장도 없다. 그저 머리 속의 생각을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있을 뿐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 번역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감동이 더더욱 놀랍다. 번역에 1년 6개월이 걸렸고 글을 다듬는 데 다시 1년 6개월이 걸렸다는 번역자 송의경씨의 말이 새삼 실감난다.

시라고도 소설이라고도 에세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모호한 장르의 책이지만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그나마 소설에 가장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화자, M, 네미 사틀레 등 세 주인공이 등장하고 몇 개의 사건도 등장한다. 하지만 사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은이는 언어학과 심리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랑에 대해 말하기 위해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기
『은밀한 생』의 저 도저한 문장들이 다루는 주제는 바로 그 흔하디 흔한 사랑이다. 지은이는 ‘사랑’이야말로 인간들 사이에 소통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라 말한다. 하지만 몇 가지 단서 조항이 있다. 잠들지 말 것, 보지 말 것, 말하지 말 것. 키냐르는 이중 가장 지키기 힘든 조항으로 말하지 말 것, 즉 침묵을 들었다. 말을 하는 순간 사랑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키냐르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긴 사랑 이야기를 썼단 말인가?

그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선 우선 키냐르의 실제 삶에 기대야 할 것 같다. 1948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출생한 키냐르는 풍금 제작에 종사하던 집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피아노·바이올린·비올라 등의 악기를 배우며 성장했다.

자라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으며 1967년에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원고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990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1994년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첼로 연주자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고대 그리스 시의 번역가다. 또, 몇 해 전 국내에서 상영됐던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은밀하게 살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 소설 속에서 그가 인용한 성경구절처럼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요한복음」7장 10절)’. 그의 삶은 점점 과묵해지고 있으며 침묵에 가까워지고 있다. 『은밀한 생』은 5백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묵하며 키냐르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나는 하찮은 문장의 반복, 실패한 농담의 되풀이, 끝마칠 수 없는 바보 같은 말의 재탕의 재탕의 재탕이 드러내는 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내가 생각해낸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말을 삼가는 것이었다. 집단적인 언어보다는 더 개인적이고 덜 호전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침묵들이 서로간에 매혹되었다. 침묵들은 서로 잘 들어맞았다.”(71쪽)

사랑은 동물적인 순수성이다
키냐르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말을 멈추고 음악으로 대화한다. 여인 네미 사틀레의 소리나지 않는 피아노, 발성되지 않는 문자언어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1996년 1월, 소설을 집필하던 키냐르는 갑자기 심한 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삶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모든 일을 중단하고 단 하나의 육체와도 같은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은밀한 생』이다. 키냐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육체와도 같은 나체로서의 순수한 사랑’이다. 사랑은 옷을 입지 않아야 한다. 옷을 입고 말을 하면 사랑이 아니게 된다. 사랑은 “위선적이고, 수다스럽고, 선명하지 못한 인간의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인 것이다. 그리고 『은밀한 생』의 몸매는 정말 아름답다. (고경원/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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