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AIG, 하룻만에 현대투신 인수 딴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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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졸업기념 만찬에서 축하를 받았다.

이날 금감위가 현대투신증권에 공동 출자를 하기 위해 AIG컨소시엄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MOU 체결 하루 만인 24일 AIG가 현대증권 신주 값이 높다며 협상을 깰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아 李위원장이 받은 축하는 "일찍 터뜨린 샴페인" 이 돼버렸다.

협상 관계자들은 "AIG가 본계약에 서명하고 돈을 집어넣을 때까지는 협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며 '협상은 지금부터 시작' 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 AIG가 딴죽을 거는 이유=AIG컨소시엄에는 여러 투자자가 참여했다. 차익을 노린 투자자 집단이다. 주식을 비싸게 사면 많은 투자수익을 거둘 수 없으므로 최종 계약을 하기 전에 가격을 후려쳐야 할 입장이다.

지난해 12월 현대와 AIG의 협상이 깨질 당시 현대증권 주가는 평균 5천7백20원이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와 AIG의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소식에 현대증권 주가가 많이 올랐다.

이처럼 오른 가격에서 10%를 깎은 주당 8천9백40원에 현대증권 주식을 인수할 수는 없다는 게 AIG측 주장이다. 8천9백40원은 턱도 없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7천원 정도만 돼도 지난해 말 상황을 감안하면 후하게 쳐주는 것이라는 게 AIG의 입장이다.

정부측 협상 관계자는 이에 대해 "본협상을 앞두고 기선을 잡기 위한 고도의 협상술" 이라고 분석했다. AIG는 전날 MOU 내용이 공개되기 무섭게 외국 언론을 통해 '신주 발행가격이 높다" 고 주장한 데 이어 이날 공식 보도자료를 뿌렸다.

한 협상전문가는 "MOU 체결에 들떠 현대투신 문제가 해결됐다고 흥분하는 분위기를 읽고 협상을 깰 수 있으니 조건을 더 들어달라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종의 '벼랑끝 전술' " 이라고 지적했다.

◇ 정부가 협상을 잘못한 것인가=정부는 AIG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겉으로는 "AIG가 언론에 그런 주장을 흘리는 속셈이 뻔하지 않으냐" 며 태연해 하고 있다.

유지창 금감위 부위원장은 "AIG는 언론에 불만을 표시했을 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다" 며 "정부로서도 정부와 AIG가 맺은 MOU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여서 공식대응은 하지 않을 방침" 이라고 강조했다.

절차상 현대증권과 AIG가 따져야 할 문제라는 얘기다.

그러나 진념 부총리와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수시로 협상이 곧 타결될 것이라고 흘려 그 때마다 속도를 내야 했고 이 때문에 불리한 조건을 감수한 적도 있다고 협상 관계자는 말했다.

협상팀은 특히 MOU 발표 이틀 전인 지난 21일 陳부총리가 "이르면 오늘 발표가 있을 것" 이라고 밝히면서 허겁지겁 협상을 마무리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 협상이 깨질 가능성은=이번 MOU에 구속력이 있다고 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깰 수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MOU를 깨더라도 위약금을 물리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통상적인 MOU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AIG가 합당한 이유없이 이를 깰 경우 정부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우자동차나 서울은행의 경우 MOU를 맺었지만 본계약을 하지 못했다.

허귀식 기자 ksl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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