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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잃어버린 20년’을 견딜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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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도쿄 총국장

일본 후지TV의 ‘호코타테(창과 방패)’란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일본 중소기업의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뚫지 못하는 건 없다’는 드릴 회사와 ‘이 세상에 어떤 구멍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금속 회사가 진검승부를 벌인다. 진 쪽은 몇 달 뒤 개량된 기술로 도전장을 던진다. 작지만 강한 기업들의 자존심이 작렬한다.

 흔히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한다. 2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고작 1.2%. 저성장을 지나 이제는 무성장에 가깝다. 게다가 지독한 디플레와 엔고에 허덕인다.

 하지만 한번 역으로 생각해 보자. 이처럼 ‘맛 간’ 일본 경제가 어떻게 해서 20년이나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속으론 곪았다고 하지만 경제 현장은 아직 끄덕없어 보이니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활력은 잃었지만 저력은 살아있는 게다. 그리고 그 버팀목은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이 휘청거려도 탄탄한 중소기업이 뒷받침해 주는 구조다.

 일본의 중소기업 수는 전체 사업자 수의 99%. 근로자 수는 80%에 부가가치는 53%를 점한다. 창업 100년이 넘는 기업만 2만2000개. 평균수명이 10년 안팎인 한국의 중소기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카이(堺)시에 있는 기계부품 회사 ‘다이요 파쓰’. 이곳은 6개월에 한 번씩 두 개의 상을 마련한다. ‘사장상’과 ‘대실패상’. 상금 액수는 2만 엔으로 똑같다. 19년 전 ‘대실패상’ 1호를 수상한 야마네(山根) 과장은 당시 그는 신규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5000만 엔의 손실을 회사에 안겼다. 1년치 매출 규모였다, 하지만 그 실패가 안겨준 노하우를 통해 이듬해부터 몇 배의 이익을 창출했다. 현재는 임원이다. 이런 도전정신이 축적된 결과 회사는 연 45억 엔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컸다.

 군마(群馬)현의 나카자토 스프링제작소. 직원 수는 21명. 하지만 신칸센 차량용 등 무려 7000종류의 스프링을 만든다. 두 달 전 이 회사는 창업 60년 만에 ‘전국 제패’를 이뤄냈다. 나카자토 사장이 소개한 비결은 기발했다. 사장은 매년 탁월한 실적을 올린 사원에게 특권을 줬다. ‘맘에 안 드는 거래처 1곳을 자를 수 있는’ 권리다. 파격적이다. 대신 사장이 직접 발로 뛰어 거래처 10곳을 새로 개척해야 한다. 그게 30년 이어진 룰이다.

 일본 중소기업의 힘은 이렇게 키워졌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기업들도 긴 세월에 걸쳐 사람과 힘을 키웠다.

 대선을 앞둔 한국에선 후보마다 ‘경제 민주화’를 외친다. 시대적 사명이란다. 하지만 각종 포퓰리즘적 규제가 민주화로 둔갑해선 곤란하다. 궁극적 지향점은 ‘경제 살리기’가 맞다. 한국 경제에도 가뜩이나 ‘일본식 장기 침체’란 적신호가 켜진 상황 아닌가.

 이쯤 해서 모두 냉정하게 자문(自問)해 볼 때다. 우리는 ‘잃어버린 20년’을 견딜 자신이 있는가. 대기업이 휘청거려도 버팀목이 될 중소기업을 키워는 두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