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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 도미니카·아이티에 ‘불’ 밝힌 한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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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호 08면

최상민 사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 광장에 있는 해상왕 장보고 기념물 앞에 서 있다. 지난달 16~18일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한상대회에 참석할 때였다. 최정동 기자

2010년 1월 12일,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 강진이 발생해 수도 포르토프랭스가 폐허로 변했다. 도미니카를 기반으로 아이티에서 발전소 운영사업을 하는 최상민(37) ESD 사장은 이날을 잊을 수 없다. 강진 피해 소식에 그는 현지 직원에게 철수 지시를 내린 후 자신은 다음 날 주도미니카 한국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아이티에 들어갔다.

파워 차세대 ⑩ 도미니카 발전설비업체 ESD 최상민 사장

최 사장은 현지 한인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실종자 찾기에 나서는 한편 아이티 전력복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복구계획을 논의했다. ESD는 당시 포르토프랭스와 인근 지역 세 곳에 있는 총 61메가와트(MW) 규모의 발전소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ESD는 자체 인력과 비용으로 발전소 복구에 나서 10여 일 만에 전력 공급을 재개했다. 이를 계기로 ESD의 아이티 발전사업은 더욱 확대됐다. 최 사장은 “당시 위기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1 지난달 하순 미 국제개발처(USAID) 지원으로 아이티에 건설된 발전소 준공식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둘째)과 함께한 최상민 사장(왼쪽). 2 USAID 지원으로 건설된 발전소 전경. [사진 ESD]

ESD는 5~30MW짜리 작은 발전소를 건설·운영하는 사업을 한다. 발전용 부품 공급, 전력망 개선사업 등도 병행한다. 규모가 큰 사업은 지분투자 형식으로 참여한다. 동서발전·현대중공업 등 국내외 업체와 손잡고 할 때가 많다. 한 해 매출은 3000만 달러(약 300억원) 안팎. 직원은 350여 명이다. 대부분 도미니카·아이티 현지인이다.

최 사장은 지난달 중순 서울에서 열린 세계 한상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도미니카ㆍ아이티의 주요 경제인사와 돈독한 관계를 구축하고, 한인사회 발전에 힘쓰며 민간 외교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범적인 청년 사업가’라고 주도미니카 한국대사관이 추천했다.

미 고교서 축구선수로 뛰며 자신감 얻어
최 사장은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고교 1학년 때까지 살았다. 남양주에 있는 동화 중ㆍ고등학교가 모교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도미니카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일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에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도미니카로 이민 가자”고 했다. 어머니가 반대했지만 그는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어려서 축구를 무척 좋아했어요.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가려 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다친 다리 때문에 선수는 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했지만 공부는 싫었어요. 자연히 학교도 싫었고요.”

그렇게 93년 5월 도미니카로 이민을 떠났다. 부모님은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식당을 했다.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생과 함께 밤 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단골 손님이 “왜 공부를 안 하고, 이런 일을 하느냐. 이게 효도하는 게 아니다”며 제대로 공부할 것을 권했다. 부모님과 상의한 뒤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하지만 난관이 만만치 않았다. 도미니카로 이민 온 한국인이 미국에 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는 관광비자를 받아 미국에 갔다. 하지만 미국 학교 입학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지 보호자(가디언)가 없었다. 도미니카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친구가 가디언 역할을 해주기로 약속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인근의 수전 와그너 고등학교(Susan Wagner High School)에 3학년으로 들어갔다. 관광비자로 온 처지라 신분은 불안했다. 그래도 학교 생활은 열심히 했다.

이때 축구가 도움이 됐다. 영어는 서툴렀지만 축구부에 들어가 미국 학생들과 어울렸다. 인근 10여 개 고등학교 친선 리그에서 만년 하위였던 그의 학교는 ‘코리안’이 합류한 그해 지역리그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축구팀의 부(副)주장이 됐다. “열심히 하고 실력이 있으면 어디서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96년 그는 뉴욕시립대(회계학 전공)에 들어갔다. 등록금이 싸고 회계학 분야는 인정받는 학교였다. 대학 입학과 함께 학생 비자(F1)를 받아 신분도 안정됐다. 부족한 영어실력을 보충해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98년엔 한국계 교수의 도움으로 한 학기 동안 연세대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직후였는데 한국과 국제사회, 경제ㆍ문화 등 여러 문제를 보고 생각한 시간이었습니다. 경기도 촌놈이 서울 신촌 문화를 가깝게 접하는 계기도 됐죠.”

한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삶과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회계학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라는 회의도 들었다. 동양인이 미국 사회에서 뭘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회계를 배워 월가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대학 졸업을 1년 앞둔 99년 9월 학교를 그만뒀다. “한번 생각하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입니다. 어렵게 들어갔지만 큰 미련은 없었어요. 부모님이 무척 반대했지만 내가 다른 길로 가서 성공하면 결국은 좋아하실 거다, 내 사업을 해보자 생각했지요.”

현지 학교·교회 세워주고 장학금 지원
도미니카로 돌아가 부모님 식당 일을 도와주던 99년 11월의 어느 날. 인조목 사업을 위해 산토도밍고를 찾은 한국 기업인이 ‘인조목 사업’을 해볼 것을 제안했다. 싸게 공급해 주겠다고 했다. 인조목 사업에 뛰어들었다. 1년 동안 골프장을 비롯한 5곳에 인조목을 공급해 1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첫 사업치고는 괜찮았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수요가 생기지 않았다. ‘시멘트 나무’를 팔며 사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그만뒀다.

2000년 가을부터 도미니카 KOTRA 무역관에서 무보수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새로 부임한 양국보 관장(현재 캐나다 밴쿠버 무역관장)이 부모님 식당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인연이 닿았다. 양 관장에게 “일을 배우고 싶으니 무역관에서 무보수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양 관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무역관에서 일하면서 사업과 무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그러던 중 현대중공업의 정병옥 부장(현재 상무)을 만났다. 2001년 11월이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자체 개발한 발전 설비를 세계 각지에 팔고 있었다. 그는 정 부장과 이야기해 발전설비 판매에 나섰다. 무급이지만 ‘KOTRA 직원’ 신분으로 관공서ㆍ발전 설비회사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에 힘입어 현지 전력회사 등에 발전설비 3기를 팔았다. 1기당 가격이 수천만 달러여서 영업 수수료로 5만 달러를 받았다.

정병옥 상무는 최 사장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무역관장한테 들으니 젊은 친구가 열심히 일을 배운다기에 발전설비 한번 팔아보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나선 후 정말 열심히 뛰더라. 도미니카 1호 발전기는 사실상 그 친구가 팔았다. 언젠가 그의 책임 아래 발전용 엔진 수리를 했는데 사고가 나서 3억원 정도를 변상해야 했다.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더라. 조사 결과 고객 잘못으로 밝혀져 변상할 필요가 없었지만 책임감 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최 사장은 발전설비를 팔아 번 돈 5만 달러를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벌였다. PVC 창호, 비디오 카메라, 원격검침기 등을 팔았다. 카드결제 단말기 사업도 했고 PC방도 열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발전기를 팔고 난 후 너무 자신감만 넘쳤지요. 카드결제 단말기는 작동 시스템도 제대로 몰랐어요. 어느 가게에서는 매출 기록이 모두 날아가 물어줘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PC방이 잘된다기에 열었는데 그것도 실패했죠. 문화가 달랐고 윈도를 PC에 무단 복제해 깐 게 걸려 벌금도 많이 물었죠.” 2002~2005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사업에 한눈 파느라 본업인 발전설비는 첫 번째 성사된 3대 이후 한 대도 더 팔지 못했다. 다행히 판매권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다시 발전설비 판매에 힘썼다.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2005년 지금의 회사인 ESD를 정식으로 세웠다. 그해에만 4대의 발전설비를 팔았다. 직원도 8명으로 늘었다. 사업 영역도 발전설비 판매에서 건설·감리 등으로 넓혔다. 2006년 매출 150만 달러, 2007년 380만 달러를 기록했다. 직원도 30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다시 위기가 닥쳤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후 발전설비 판매는 물론 부품·서비스 사업 매출이 줄었다. 일부 발전소 건설은 중단되기도 했다. 직원을 15명으로 줄이는 등 내실을 기하면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섰다. 태양광 발전소 건설사업에도 진출했다. 또 한국전력과 함께 도미니카 배전망 개선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미 국제개발처(USAID) 지원으로 아이티에 건설하는 발전소 건설사업을 수주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지역사회 공헌에도 나서 학교ㆍ교회 등을 지어주고 불우 학생에겐 학비를 보조했다.

최 사장은 도미니카·아이티는 전력 보급률이 낮아 사업 전망이 밝다고 말했다. 체계적인 발전소 건설기법을 개발하고 표준화된 발전소 운영 노하우를 갖춰 두 나라의 전력산업 시장을 넓혀 나간다는 계획이다. 그의 꿈은 옹골차다.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을 들여와 건강검진 사업도 할 계획인데 현지 발전에 기여하면서 중남미 한인 1.5세대의 롤 모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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