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세도가 금고 터는 사이 공무원들은 잠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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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여수시 8급 공무원 김모씨가 수 년간 세금 76억원을 횡령하는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2년에 한 번 하는 전남도의 종합감사, 매년 실시하는 여수시의 자체 감사, 시의회의 회계감사에서도 그의 대담한 도둑질은 적발되지 않았다. 그가 직원들의 근로소득세를 빼돌리고, 시에서 발행한 상품권 소지자에게 지급하는 환급액을 부풀리며, 퇴직 공무원의 급여를 가로채도 이를 감시하고 적발하는 내·외부 감시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김씨가 이렇듯 세금 도둑질을 벌일 수 있었던 건 여수시가 그에게 입출금 내역을 수기(手記)로 작성할 수 있도록 방치한 탓이다. 그가 자기 맘대로 서류를 위조하고 상급자 도장만 받으면 시민들이 낸 세금은 그의 차명계좌를 거쳐 그의 친가나 처가 식구들의 아파트를 사고, 외제차를 굴리는 데 쓰였다. 김씨가 근무했던 회계과의 부서장이나 감사 라인에 있던 공직자들은 이런 범죄 행각을 진정으로 몰랐던 건지, 아니면 뒷돈을 받고 묵인해 준 건지 검찰 조사에서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다른 지자체들은 재무회계 관리를 공무원 개인의 수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국세청 등 외부 유관기관과 재무회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e-호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 시스템을 운영하면 공무원이 작성한 예산지급명령서 등 지출 과정이 모두 전산 처리돼 부정이 저질러질 여지가 줄어든다고 한다. 여수시는 사고가 터진 뒤에야 부랴부랴 이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 뒷북 행정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김충석 여수시장은 이번 일과 관련해 사과를 했으나 시민들의 허탈감을 달래기엔 한참 부족하다. 무엇보다 김씨의 결재 라인에 있었던 상급자들을 모두 찾아내 이들의 책임을 엄하게 물어야 한다. 특히 김 시장의 지시로 한 달 전 회계과에 대한 특별감사를 한 시청 감사팀이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이 정도의 감사 시스템으로 나사 빠진 공무원들의 복무기강을 바로잡을 수 없다. 부실한 감사 기능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