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남대문금고의 초상화

중앙일보

입력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3가 110, 도심 한복판에 통화신용정책을 책임지는 이 땅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자리잡고 있다. 8층 강당에는 역대 한국은행 총재의 초상화가 죽 걸려 있다. 그런데 아직 걸리지 못한 초상화가 하나 있다.

*** 韓銀은 과연 독립했는가

한국은행의 가장 큰 책무는 물가를 안정시켜 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돈의 양과 흐름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옛 재무부 장관이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의장을 맡던 시절, 한국은행은 재무부에 휘둘리는 일이 잦아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로 불리기도 했다.

여러 차례 중앙은행 독립을 외치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인 1998년 초 마침내 한국은행법을 바꿨다.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은행감독원을 한국은행에서 떼어내 금융감독원에 통합하고 한국은행의 예산을 재정경제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데 불만을 품은 한국은행 노조는 당시 이경식 총재의 초상화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임기가 8개월여 남은 현 전철환 총재의 초상화를 어찌할지가 고민이다. 지금이라도 이경식 전 총재 초상화를 걸자니 노조가 반대할까봐 걱정이고, 비워 놓고 걸자니 이빨이 빠진 듯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융통화위원회가 의장으로 한국은행 총재를 모신 뒤 중앙은행은 과연 독립했는가. 이름과 형식에선 재경부의 '직접 통치' 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 중앙은행의 위상을 찾을만한 일을 책임지고 하기보다 은행에 돈을 빌려주고 외화 곳간이나 지키는 '남대문금고' 로 바뀐 정도라고 주변에서 말한다.

경제 규모가 커져 돈을 푸는 양만으로 경기를 조절하기 어려우면 돈값을 조절하는 정책을 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경기가 가라앉자 올 들어 연방기금 금리를 여섯 차례 낮췄다. FRB 의장인 그린스펀이 입을 열면 시장은 귀를 기울였고, 미국 월가는 물론 세계 증시가 움직였다.

우리 중앙은행도 올 들어 콜금리를 두차례 낮췄다. 그러나 시장 반응은 시큰둥했다.

금리 조정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6개월 뒤쯤 나타난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은 경기와 물가 변동을 예측해 선제적(先制的)으로 해야 제때 효과가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금리조정은 경기와 시장 흐름을 뒤쫓아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 하반기 초 경기가 과열 양상을 보이자 금리인상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8, 9월 경기가 가파르게 상승할 때 가만히 있다가 경기가 내리막길로 들어선 10월에야 금리를 올렸다. 경기하강 국면에 금리를 올린 '거꾸로 금리정책' 을 편 셈이다.

그 뒤 경기가 계속 내리막인데도 금리를 내리지 않다가 올 2월 초에야 0.25%포인트 인하에 그쳤다.

이같은 금리 결정의 주도권을 쥔 한국은행과 전철환 총재는 그동안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최근 전철환 총재가 발언이 잦고 수사적 표현에도 신경쓰는 눈치다.

통화정책에 대해 물가.경기 및 금융시장 동향을 보면서 '탄력적으로' 운용하겠다던 그는 16일 '시의성있게' 대처하겠다는 식으로 표현을 바꿨다.

경기가 나쁘고 투자가 부진하니 금리를 빨리 더 낮춰야 한다는 시장의 기대를 멀리한 채 물가안정이 중요하다며 6월까지 금리인하를 거부한 그가 7월 5일 콜금리를 낮추더니만 열흘여 만에 추가 금리인하를 내비친 것이다.

*** 거꾸로 금리정책에 실망

한국은행은 지난달 12일 창립 51주년을 맞아 화폐금융박물관을 열었다.

학생들이 반겼다. 그런데 토요일은 오후 1시30분까지 문을 열고, 일요일과 공휴일은 물론 다른 일반 박물관이 쉬는 월요일에도 쉰다. 와서 보라는 것인지, 박물관 개관을 과시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국은행이 시장(관람객)이 아닌 공급자 입장에서 일하는 또 다른 사례다.

'은행의 은행' 으로서 금융회사를 상대로 예금을 받거나 돈을 빌려주기만 해서 그런가. 우리 중앙은행은 언제쯤 시장을 제대로 읽고 뒷북이 아닌 앞북을 칠 것인가.

양재찬 경제부장 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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