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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미안! 저도 이런 생각 한 적 있어요”

중앙일보

입력

엄마, 안녕하세요?
매일 보면서 갑자기 무슨 인사냐고요? 히히, 그럴 일이 있어요.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거든요. 또 뭐 사 달라고 졸라 댈 거냐고요? 엄마는 참!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되었는데 제가 뭐 철부지인가요?

엄마, 어제 일 기억나세요? 제가 맨날 컴퓨터 게임만 한다고 화를 내셨잖아요. 그런데 그 때 저 오락하고 있던 거 아니에요. 인터넷에서 박물관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먼저 화부터 내시고, 제 얘기도 안 들어 주시고… 정말 얼마나 속 상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책상 위에 한참 엎드려 있었단 말이에요.

만약 그 때 이 동화책을 발견하지 못 했다면 제 기분은 하루 종일 엉망이었을 거예요. <마법의 설탕 두 조각>. 며칠 전에 친구가 빌려 준 책이에요. 책상에 엎드려 있기가 슬슬 지겨워질 때 쯤 책꽂이에서 이 책을 뽑았지요.

아마 이 책이 재미가 없었다면 저는 금세 책을 휙 덮어버리고 밖으로 나가서 놀았을 거예요. 그런데 첫 부분이 마치 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안 돼, 벌써 두 개나 먹었잖아.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배 아파요." "네가 해. 너도 이제 다 컸잖아." 엄마,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같죠? 엄마가 늘 저에게 하시는 얘기잖아요.

이 책의 주인공은 렝켄이라는 여자 아이예요. 그런데 걔도 저처럼 맨날 엄마, 아빠한테 혼 나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렝켄의 부모님도 렝켄의 의견을 자주 무시하셨다지 뭐예요. 그래서 렝켄은 씩씩거리며 집에서 나왔대요. 요정을 찾아가서 '엄마, 아빠를 혼내 달라'고 부탁하려고 말이에요. '뭐? 엄마, 아빠를 혼내주는 요정?' 저는 그 순간부터 이야기에 폭 빠져 들었어요.

렝켄이 만난 요정은 조금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이상한 아줌마였어요. 렝켄은 요정 아줌마에게 신기한 설탕 두 조각을 얻어 왔답니다. 그러고는 몰래 엄마, 아빠가 마시는 차에 설탕을 쏙 넣었지요. 그런데 엄마, 그 설탕이 어떤 건지 아세요? 만약 렝켄의 부모님이 렝켄의 의견에 반대하기만 하면 금세 키가 반으로 푸시식 줄어들게 만드는 설탕이었어요. 하하하, 너무 통쾌하다! 어? 엄마,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시라니까요!

이제 렝켄의 부모님은 자꾸만 작아지셔서 성냥개비를 들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자꾸만 렝켄의 의견에 반대를 하시지 뭐예요? 정말, 세계의 어느 곳에 가도 엄마, 아빠는 다 똑 같은가 봐요.

그런데, 엄마. 여기까지 읽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엄마, 아빠를 혼내 주는 렝켄. 그 아이가 부러워서 그런 신기한 설탕을 나도 가지고 싶었는데… 하지만 자꾸만 작아지시는 렝켄 부모님을 보니까 처음에는 낄낄낄, 아주 웃기더니만 조금씩 슬퍼지기 시작하면서 기분이 정말 오락가락하더라고요. 집안에서 내가 제일 키가 크면 잔소리 할 사람도 없고, 컴퓨터 게임도 마음대로 하고, 정말 즐거울 것 같았는데…

아마 렝켄도 저랑 비슷한 느낌을 가졌나 봐요. 그래서 다시 요정을 찾아가서 마법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보았대요.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나 이상했어요. 이번에는 렝켄이 마법의 설탕을 꿀꺽 삼키고 엄마, 아빠의 말에 모두 찬성해야 한다나요? 으아! 이럴 수가! 그런데 몇 장 더 읽어 보니까 이야기가 아주 행복하게 끝이 났어요. 다시 렝켄이 부러워질 만큼.

엄마, 이 동화책을 읽고 나서는 조금 화가 풀렸어요. 저도 가끔 엄마에게 화가 나지만, 엄마가 영원히 키가 작아지시는 걸 바라지는 않거든요. 예전에 읽은 어떤 동화에서 할머니는 손녀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며 조금씩 조금씩 키가 작아지셨어요. 그걸 어른들은 늙어간다고 하시나 봐요.

그 동화를 읽고 왠지 슬프고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요. 그래요, 엄마. 저는 엄마가 제게 지혜를 많이 나누어 주시더라도 영원히 저보다 더 크고 힘이 센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엄마, 저의 이 기특한 마음을 알아 주시고요, 앞으로는 제발 제 의견을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우리 반에서는 인기 있는 아이란 말이에요. (최덕수/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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