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굴’ 그리스 찾아간 메르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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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앙겔라 메르켈(58) 독일 총리가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화난 맹수를 달랠 먹잇감이 들려 있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9일 오후(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다. 5년 만의 행차였으니 3년 전에 시작된 그리스의 재정위기 발생 이후 처음이었다.

 지난 7월 재정위기 문제 논의를 위해 독일을 찾았던 안도니스 사마라스 그리스 총리의 초청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그리스를 방문한 메르켈은 사마라스 총리,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을 잇따라 만났다. 메르켈은 사마라스와 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구조 개혁 등 상당 부분에 있어 사마라스 총리가 큰 성과를 이뤄 냈다”고 치하한 뒤 “긴축재정은 어려운 길이지만, 그리스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사마라스 총리는 “그리스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지만 유로존을 탈퇴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혁의 속도 조절 등 사마라스가 기대한 ‘선물’은 없었다. 메르켈은 회담에서 그리스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는 말을 했지만 지연되고 있는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 약속한 개혁 조치들을 이행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스의 개혁 조치가 늦어지는 것은 독일 국민의 추가 부담을 의미하며, 이는 선거를 앞둔 메르켈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그리스 대중으로부터는 ‘분노의 환영’을 받았다. 긴축정책으로 신음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그를, 졸라맨 허리띠를 더욱 옥죄야 하는 고통을 강요한 대표적 인물로 여겨 왔다. 야당과 노조들은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그리스 사회를 파괴한 장본인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아테네 시민 수천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메르켈을 나치에 빗대 만(卍)자가 그려진 깃발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리스 정부는 7000명의 사복경찰을 동원해 공원 등 시내 곳곳을 봉쇄, 시위가 소요사태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시위대 수십 명이 돌과 화염병을 던지자 경찰은 섬광탄과 최루가스를 쏘며 진압에 나섰다. 주요 길목의 건물 위에는 저격수가 배치됐 다.

 메르켈이 자신의 방문이 그리스인들을 자극할 것이라는 점을 몰랐을 리 없다. 독일 정부 내에서도 경호 문제 등 때문에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요란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일도 좀처럼 없다. 이에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메르켈의 방문은 독일 내부 정치를 위한 제스처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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