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의회 온건·협상파는 ‘멸종’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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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미 공화당의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이 지난 5월 당내 경선에서 패했을 때 백악관은 “유권자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공복”이라는 특별성명을 냈다. 경선에서 패한 야당 의원을 위해 백악관이 성명까지 낸 데는 이유가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천한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인준에 찬성표를 던지는 등 국익을 우선하는 의회 내 대표적인 협상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거 의원은 당 밖에서 칭송받은 이 행위를 정치 인생과 맞바꿔야 했다. 공화당 강경보수 유권자운동인 ‘티파티’가 당의 배신자라고 낙인찍은 뒤 인디애나주까지 몰려와 경쟁 후보를 대대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6선 의원에 36년 의정생활을 한 그가 신출내기인 리처드 머독 후보를 상대로 얻은 표는 40%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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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거에게 앞서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호 개정법을 공화당 상원의원으로서 유일하게 찬성했던 메인주의 올림피아 스노는 아예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내 강경보수 그룹이 그리스계 여성의원인 그녀에게 모욕을 주는 등 낙선 압력을 가해서다. 스노 의원은 “워싱턴 정치가 양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개탄했다.

 미 의회에서 협상파·온건파 의원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11월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민주·공화 양당의 온건파 의원들이 너나없이 당내 강경파들의 압박과 갈수록 첨예화하는 이념 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켄트 콘래드, 짐 웹, 벤 넬슨 상원의원이 이미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찰스 배스 공화당 하원의원 같은 인사는 아예 중도에서 이탈하겠다는 ‘항복’ 선언으로 당내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 불출마를 선언한 댄 로런 민주당 하원의원은 “온건파들을 위한 당내 위협은 무서울 정도”라며 “자신이 속한 당이나 그룹에 100% 충성하지 않으면 바로 목표가 된다”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다. 공화당과의 협상에 앞장선 ‘블루독(보수적인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 등 민주당 온건파들은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특정인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정하는 것)의 희생양이 돼 낙선 위기에 몰려 있다. 래리 키셀, 존 배로, 짐 매더슨 하원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블루독’ 중 한 명인 짐 쿠퍼 하원의원은 “대결정치에서 해법을 찾으려면 온건파들은 꼭 필요한 존재”라며 “하지만 우리 온건파들은 지금 멸종위기에 몰려 있다”고 토로했다.

 정치학자들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치에 밀린 의회정치의 실종을 경고하는 목소리를 잇따라 내고 있다.

 로체스터대 정치학 교수인 케이스 풀은 “지난 10년간 미 의회는 민주·공화 양당 대결이 첨예화하면서 점점 정파적으로 치닫고 있다”며 “폭력과 섹스 같은 해로운 장면을 담았지만 관객들은 좋아하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의회정치가 양 극단으로 치닫는 반면에 미국의 운명을 좌우할 법안이 차기 의회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당장 미국의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한 법안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연말이 시효인 중산층 세 감면법도 추가 연장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초읽기에 몰려 있다. 하지만 행정부 대 의회, 민주당이 장악한 상원 대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 등 대결정치라는 십자 그물에 걸려 이번 회기 동안 미 의회는 1947년 이래 가장 적은 수의 법안을 처리했다는 불명예를 기록했을 만큼 상황은 어둡다. 민주당 온건파로 활동했던 제인 하먼 전 하원의원은 “11월 대선에서 승리할 차기 대통령 앞에 놓인 가장 큰 숙제는 의회를 상대로 한 정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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