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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안철수 말 속에서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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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국제정치부문 차장

“이래서 정치가 불신을 받고 국민들께서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착잡한 심정이 든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25일 한 말이다. 정부가 0~2세 영·유아에 대한 보육지원 축소책을 내놓은 데 대해서다. 그는 그러면서 “(복지정책이) 현실적으로 되기 위해 재정·조세까지 통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대선 후보로서 정책에 대한 사실상 첫 구체적 언급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지난해 초부터 길고 길었던 무상보육 논란 과정을 염두에 뒀다면 좀 달랐어야 하지 않았을까.

 주지하다시피 무상보육 논란은 국회발(發) 혼란이었다. 지난해 예결위 차원에서도 제대로 논의가 되지 않았던 걸 여야가 막판 정부와의 비공개 협상에 밀어 넣었다. 기초노령연금과 반값 등록금 등 일련의 무상시리즈와 함께다. 안 된다고 버티던 정부가 결국 손을 들었다. 당시 협상 과정을 아는 여권 인사는 “하나는 받아야 예산이 통과되지 않겠는가. 보육이 우리 정부가 강조해 온 것인 데다 부담이 덜해서 택했다”고 말했다.

 사실 전문가들은 0~2세는 집에서(양육), 3세부터 시설에서(보육) 키우도록 권장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0~2세만을 택했고, 양육 아닌 보육을 골랐다. 0~2세를 택한 건 대상 아동수가 적을 거란 추산 때문이었다. 보육을 선택한 이유도 짐작은 간다. 양육은 아이와 부모가, 보육은 거기에 보육시설 종사자까지 수혜자이기 때문일 거다. 표의 수가 다르다. 이후 혼란상은 모두 아는 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왕 도입했으니 계속 추진해야 하는가, 아니면 욕을 먹더라도 잘못된 정책이니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는 게 나은가. 선택의 문제였다. 정부는 후자를, 양당은 전자를 택했다.

 안 후보는 불명료하다. 그는 “정치권도, 정부도 잘못했다”며 양비론(兩非論)에 머물렀다. 대부분은 정부에 원상회복을 요구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일부는 복지논쟁에서 차별성을 보였다고 여겼다.

 그는 『안철수의 생각』에서 보육과 관련해 보편성을 지향하면서도 점진적 변화를 강조했었다. 의료봉사 경험을 얘기하며 “공짜로 약을 주니 환자들이 버려 아이들이 그 약으로 공깃돌 놀이를 하더라. 공짜가 반드시 좋은 방법은 아니다”란 취지의 말도 했다. “능력대로 내고, 필요한 만큼 쓰자”고 한 것도 여러 대목이다. 그게 진정이었다면 “문제를 풀어야 할 정치가 문제를 만들었다”고 비판했어야 맞지 않을까. 이제라도 바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안 후보가 저렇게라도 말해준 걸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껏 추상명사로만 말해 왔다. ‘혁신경제’ ‘포용적 성장’ 등등. 그래서 대선을 불과 80여 일 남겨둔 유력 주자인데 ‘좋은 일 하겠다’는 본인의 말 외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누구와 일할지 누구도 모른다. 그저 야권주자려니 한다. 그 자신이 “세부 공약에 집착하기보다 철학·우선순위·문제풀이에 집중하겠다”고 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문제풀이가 곧 공약이고, 국정철학과 정책의 우선순위가 담긴 게 공약집인데도 말이다.

 그가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으니 비판할 거리도 한정된다. 책이 나온 지 두 달인데 여전히 “정치경험이 없다” “끝까지 완주할 거냐, 단일화할 거냐”는 질문만 던진다. “전세 설움을 안다더니 모친 집에서 산 걸 두고 그랬느냐”는 식으로 그의 말 속을 헤매며 행동과의 괴리를 찾아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 후발주자로서 누구보다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덜 검증받는 후보가 되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무 정책적 대안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그러고 나서야 정책 대안을 서둘러 만들고 새로 통치이념을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도 안정적이 되기도 어렵다. 의외성이 일상화되고 있는 건 정치가 그만큼 나빠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안 후보는 정치가 나빠서 정치로 소환된 사람이다. 그의 정치가 정치를 좋게 만들고 있는가, 그 반대란 생각이 자꾸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