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현대상선 김형기씨

중앙일보

입력

"어이!

현대리, 좀 더 세게 나가야지. "

현대상선 홍보실에 근무하는 김형기(金亨起.27)씨는 회사 동료들에게서 이런 압력을 종종 받는다.

지난해 3월부터 사보에 연재하고 있는 만화 '좌충우돌 현대리' 의 주인공을 좀더 적극적인 인물로 묘사하라는 것이다.

金씨는 1999년말 입사 면접 때 취미가 만화라고 밝힌 것이 계기가 돼 사보만화를 맡게 됐다. 그는 연세대 행정학과 재학 중 '만화사랑'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한 만화광이다.

친구 두명과 함께 6백여장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도 있다. 한때는 만화가나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만화 주인공인 현(現)대리는 30대 초반의 샐러리맨으로, 일을 열심히 하고 책임감도 강하다. 하지만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소심한 성격에 업무성과가 신통치 않다고 핀잔듣기 일쑤다.

외국 바이어 앞에서 영어를 못해 상사의 눈총을 받고, 술에 취해 공중전화 부스에서 잠든다. 지각해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사무실에 들어오다 발각돼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나 명분이 뚜렷할 경우엔 상사에게 대들기도 한다. 대부분 자신의 경험담이다.

사보 만화가로서 그의 꿈은 소박하다. 배를 타고 오대양 육대주 망망대해를 누비는 직원들이 만화를 보는 순간만이라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金씨는 "직원들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 말했다. 그러나 만화 마감일(매달 20일)이 다가오면 좀더 좋은 작품을 내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마감 당일에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매달말 사보가 나오면 그는 혹 상사들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는지 염려해 슬며시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 아직까지 '필화(筆禍)사건' 은 없었다. 일부 중간 간부들은 "경계선상에 있는 위험한 작품이 내부검열을 피해 출판됐다" 며 눈을 흘기기도 한다. 반면 젊은 사원들은 좀더 시원하고 직설적으로 만화를 그리라고 주문한다.

金씨는 "소재에 제한은 없다. 주인공이 대리여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급하면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목소리도 커질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사원인데도 만화 덕분에 '현대리' 로 진급했다. 만화 원고료 5만원을 받아 회사 동기들과 소주잔을 나눌 때 행복감을 느낀다.

김상우 기자 sw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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