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해적 소탕(海賊 掃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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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해마다 국제기구들이 노동유연성.인권.언론자유.부패 등에 대한 나라별 랭킹을 발표할 때마다 우리는 실력에 걸맞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곤 한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교역량 세계 12위 경제 규모의 나라임에도 각종 순위에서는 하위권을 맴돌고 있을 따름이다.

앞으로의 전망도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최근 국내외 신문지면을 심심찮게 장식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취약과목'이 조만간 랭킹 발표 대상에 추가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지적재산권 문제로 들끓고 있다. 특히 요즘 들어 매년 500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는 '해적판' 문제가 세계적인 이슈로 급부상하고 있다. 해적판의 사각지대라 할 우리 입장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미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화나 음반, 소프트웨어의 복사판 범람은 이제 '해적 행위'라는 말이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를 막고자 미국에서는 극장 내 영화 녹화 행위에 대해 최고 2만5000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있지만, 할리우드 신작 영화는 출시 3일이면 지구촌 구석구석의 인터넷 공간에서 절찬리에 개봉되고 있다.

음반은 더하다. 정식 앨범을 다 찍기도 전에 이미 해적판이 새어나오고 불과 세 시간이면 전 세계에 무사고 배달이 완료되는 현실이 이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공산품이라고 다르지 않다. 특히 연간 12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자동차 부품의 피해가 막심한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우리 소형차를 그대로 베낀 '짝퉁' 자동차가 버젓이 팔리고 있고, 일본 도요타와 외관만 같은 '무늬만 도요타' 자동차가 '도다요'라는 상표를 달고 굴러다니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흔히들 해적판의 피해가 영화나 음반, 소프트웨어 같은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제품에 보편화한 현상이다.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의약품마저 가짜가 판치는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 현재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는 발기부전 치료제의 절반 이상, 아프리카에서 유통되는 의약품의 30% 정도가 가짜라는 조사 결과도 있고 보면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 밀가루로 모양만 본떠 만든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라도 더 팔 요량으로 각종 유해성분까지 가미해 인체에 치명적 손상을 주고 있다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중국에서 가짜 분유 파동으로 수십 명의 무고한 생명이 화를 당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렇듯 '해적'에 의한 폐해는 아이디어의 약탈을 넘어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만큼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사정이 이쯤 되자 국제사회가 가만있을 리 없다. 특히 견디다 못한 각국 업계를 중심으로 강력한 '해적 소탕' 작전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기업들로 구성된 국제상업회의소(ICC)에서는 7월 개최 예정인 G8 정상회담에서 이를 정식 의제로 다루어 달라는 진정서를 주최국인 영국 총리에게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ICC 또한 올해 중 나라별로 지적재산권 보호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고 내년에는 이를 토대로 해적 행위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각국 정부에 요청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구체적인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ICC 차원에서 지적재산권 보호의 우등생, 열등생을 조사해 국가별 랭킹을 발표키로 함에 따라 지적재산권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은 우리로서는 사정이 다급하게 됐다.

불명예스러운 세계 랭킹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 지적재산권 문제로 또다시 국제사회의 구설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보다 강력한 조치가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 은밀하게 거래되는 가짜상품에 얼마나 강력한 단속을 펴고 있는지, 해적판 방지를 위해 어떤 보호 조치를 가지고 있으며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와 판매에 사법당국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여부가 앞으로의 랭킹 결정에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창조적인 예술가를 죽이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꽃도 피워보기 전에 말살시키는 지적재산권 약탈 행위를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