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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바람의 겨레, 大勢가 大過 될 수도 있거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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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호 11면

“황금의 자? 그것은 주역의 비밀코드일세.”
백두옹은 활터에서 내려와 천천히 거닐었다. 초가을 오후의 햇살에 치렁치렁한 백발이 물살 가르는 은어처럼 빛났다. 흰 두루마기 차림의 노익장은 학 같은 자태로 하늘을 우러렀다.
“그 비밀코드가 뭐냐고요?”
강 교수는 더 궁금해졌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⑨

“허허허, 그걸 함부로 일러줄 수가 있겠나! 강 교수가 유력한 대권 후보도 아니고 말일세. 한국 역학 정역(正易)의 문법으로 말해볼까? 이 천지가 해와 달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해와 달도 지인(至人:참사람)이 아니면 헛된 그림자라. 때가 되면 그 후보에게 밀지(密旨)를 보낼 것이네. 그게 어찌 내가 일러주는 것이겠는가. 전에도 말했듯 시명(時命)이니 천공(天工:하늘의 조화)이 마땅한 사람을 기다려 대업을 이룰 줄 그 누가 알리요.”
사회과학자인 강 교수로서는 도무지 모호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백두옹에게는 돌에 새긴 글자처럼 뚜렷한 말씀이었다.
둘은 큰길가로 나왔다. 백두옹이 택시를 잡으려 하자, 강 교수가 팔을 잡아 이끌었다.

“저 아래 통인시장에서 전어구이 한 접시 하시고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을 전어에 막걸리 한 잔? 그거 좋지.”
어두웠던 백두옹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아버지의 잘못까지 계승하면 불효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 민주통합당은 문재인 후보가 경선에서 연승 행진을 달리고 있었고 안철수 원장은 출마 선언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발언으로 민심이 요동쳤다. 박 후보의 역사 인식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심각했다. 견고하던 지지율이 소폭 하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자 대결이나 양자 대결에선 여전히 선두였다.
“할아버님, 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외손자 며느리가 햇사과를 깎아 내오며 특유의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또?”

백두옹은 스마트폰으로 EBS 제작 e채널 동영상을 보다가 묻는다. 인혁당 사건 재심 판결을 다룬 300초짜리 영상물이었다. 백두옹에게 강남스타일의 전형 같은 며느리의 언행은 세상의 어떤 동영상보다 유쾌하다. 뒷방 노인네 취급하지 않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이르고 백두옹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늘 친구처럼 대하는 게 고마웠다. 그래서 백두옹도 스스럼없이 대하려고 애쓴다.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고 아랫사람보다 윗사람 하기 나름이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자기는 자기지, 왜 박통이 명백하게 잘못한 일까지 미화하려고 들어서 비난을 자초할까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견고한 지지세력은 변함이 없어요. 100% 국민 통합을 내걸고 광폭 행보하면 뭐해요. 새로 생겨난 지지층이 진정성을 의심하고 되돌아서는 걸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마음 못 정하던 제 친구들도 솔깃했다가 아무래도 박근혜는 안 되겠다고 하네요.”

“너라면 어떡하겠니?”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의 사법 살인이었다는 게 일반 국민의 역사 인식이에요. 그걸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요? 미래는 내버려두고 왜 과거 얘기만 하느냐고요? 정치 지도자의 역사관은 미래를 여는 키예요. 그래서 중요한 거고 그래서 자꾸 되묻는 거라고요. ‘딸로서 참 어려운 입장이지만 잘못되었다. 유신의 그늘이다. 내가 그 그늘에 묻힌 아픔을 품어주고 달래드리겠다. 우리 대승적으로 손잡고 미래로 가자!’ 이렇게 말하면 국민들이 박수 치고 대세를 몰아줄 건데 참 미련해요.”

솔직한 성격의 외손자 며느리는 거침이 없다.
“영특한 우리 며늘아기, 네가 핵심 측근에게 일러주렴.”
“왜 안 했겠어요?”
“뭐라던?”

“어쨌거나 당선은 무난하다며 귀 기울여 듣지를 않네요.”
“한비자의 개로구나.”
“네?”
“주막에 술이 잘 익었으면 뭐하랴. 사나운 개가 막고 서있어서 손님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걸. 혼자서 다 결정하는 박 후보 스타일도 문제지만 불통의 칸막이를 치는 친박 핵심도 문제다.”
백두옹은 서가에서 소(小) 주역이라고도 불리는 중용을 꺼내 펼쳤다.
“여기 18장에 계지술사(繼志述事)라는 말이 나온단다.”
“계지술사요?”

“그래.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는 뜻이지. 단, 아버지의 옳았던 걸 계승해야지 그른 걸 계승하면 효도가 아니라 불효란다. 군자의 도에 맞는 걸 계승해야 진정한 효도야. 무엇이 군자의 도인가? 하늘에 떳떳하고 세상 사람들한테도 의심받지 않는 도리지. 박 후보가 유신시대를 감싸는 인상을 주면 국민은 자꾸 그 시절의 공포정치를 떠올리게 돼.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에 큰 공적이 있는 대신 민주화에 허물이 있어. 박 후보가 말로 두둔할 게 아니라 올바른 정사를 펼치면 그 허물이 승화되는 거야.”

“나라에 큰 스승이 없는데 우리 할아버님이 스승 노릇 하시네요.”
외손자 며느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찬사를 보낸다.
“늙어 꼬부라진 잔소리꾼이지 스승은 무슨.”

혼자 남은 백두옹은 틀니를 끼우고 사과를 맛보았다. 그 모진 태풍을 견디고 익은 과육은 달콤했다. 단것만 찾아 다니는 정치인들도 그들 자신이 꼭 이 사과만 같았으면 좋겠다.

강대국 쇠망 원인은 교만과 안이
백두옹은 가끔씩 하던 대로 의자에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주역 <계사전(繫辭傳)>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신세대들에게는 생소한 고저와 청탁에 맞춰서 경전을 읽는 음영법(吟詠法)이었다. 그 소리가 깊고 그윽하다. 깊고 그윽한 소리는 구강과 비강을 울리고 뇌세포를 자극한다. 이른바 소리 선(禪)의 기능을 하게 되고 신묘한 경지에 다다르기도 한다. 머릿속에 괘상이 떠오르고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간다.

명학재음(鳴鶴在陰)이어늘 기자화지(其子和之)로다. 아유호작(我有好爵)하니 오여이미지(吾與爾靡之)라 하여늘 자왈(子曰), 군자거기실(君子居其室)하여 출기언선(出其言善)이면 즉천리지외응지(則千里之外應之)리니 황기이자호(況其邇者乎)아.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 내 좋은 벼슬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와 함께하리라(중부괘) 했으니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가 집에서 말해도 옳으면 천리 밖에서도 응하니 하물며 가까운 자에 있어서야.

언출기신(言出乎身)하여 가호민(加乎民)하고, 행발호이(行發乎邇)하여 견호원(見乎遠)하나니, 언행(言行)은 군자지추기(君子之樞機)요, 추기지발(樞機之發)은 영욕지주야(榮辱之主也)니라. 언행(言行)은 군자지소이동천지야(君子之所以動天地也)니 가불신호(可不愼乎)아?
말은 몸에서 나와 국민에게 가해지며, 행실은 가까운 곳에서 비롯되어 먼 곳에 나타나니, 언행은 군자의 중추가 되는 기물이라 그 기물의 표출로 영욕이 갈린다. 언행은 군자가 민심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감각으로 행동을 유발하지만 인간은 언어로 행동을 유발한다. 인간은 언어라는 ‘의미의 장’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국민을 고무시키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대통령 후보 된 자라면 더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뜻이 좋았지만 막말 때문에 대사를 그르쳤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다. 말은 신념으로 형성된 기억의 표출이기도 하다. 신념은 흔들림 없는 견해나 사상이다. 사회성을 지닐 때는 힘을 얻지만 주관적이거나 파당적일 때는 독단이 되고 만다.

박근혜·안철수·문재인 후보는 모두 말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말수가 적고 말투가 짧다. 그래서 실수가 적은 편이다. 문제는 내용이다. 내용에 결정적인 흠이 있으면 적은 말수와 짧은 말투가 도리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불씨가 되고 증폭된다.

지금 박근혜 후보가 위기다. 그 사달은 어이없게도 말 한마디였다. 말 한마디로 다 쥐었던 천하를 놓치게 생겼다. 한민족은 바람의 겨레다. 11월 말이나 12월 초께, 대선 막판에 야권의 드라마 같은 단일화로 광풍이 불면 대세는 대과(大過)가 될 수 있다. 한 번의 말실수에는 국민이 좀 의아해할 뿐이었지만 두 번째는 지금처럼 민감해지고 이후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낳는다. 언어가 갖는 분위기적 속성 때문에 그렇다. 개혁정치 하기 전에 당사자부터 말끔히 털갈이하라고 했다. 지금이야말로 박근혜 후보가 말조심 단계에서 나아가 과감히 털갈이해야 할 때다. 더 고집 피우면 당락을 좌우할 중도층이 야권으로 떠나가 버린다.
비(否:

) 괘 다섯째 효에 기망기망(其亡其亡) 계우포상(繫于苞桑)이라 했다. 망할까, 망할까 우려하여 뽕나무에라도 매달린다는 비유다. 그러면 안 망하고 도리어 흥한다. 아널드 토인비도 같은 말을 했다. 역사적인 성공의 절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고 로마 제국 같은 강대국들이 망한 원인은 천재지변이나 외부 침략이 아닌 교만과 안이 때문이었다고.

궁(窮)하면 변(變)하게 마련이다. 변하면 통(通)하고 통하면 오래(久)간다. 이것이 주역의 중심을 꿰뚫고 있는 궁변통구의 이치다. 큰일을 도모할 대인이라면 무엇이 됐건 변화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 20년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고 했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 일류가 된 저력이 그런 경영 혁신에 있다. 누가 뭐래도 지금 대한민국의 무게중심은 경제계의 이건희 회장, 정치계의 박근혜 후보다. 그 둘이 변하면 대한민국이 변한다.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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