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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때 성폭행' 女배우, 상처 숨기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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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섹슈얼 트라우마
K 엘런 정(정국) 지음
블루닷, 632쪽, 2만8000원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여덟 살 때 겪었던 최악의 고통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잘 모른다. 고아원을 전전하던 그때 이웃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직후 그를 입양했던 양부모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았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지옥의 경험이 훗날 그를 비극적 자살로 몰고 간 계기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먼로는 “내면의 고통을 숨기고자 가면을 쓴 아동 성학대 피해자 삶”(154쪽)의 전형이다. 이 책에 따르면, 성적 학대와 폭력에 노출됐던 경험을 가진 유명인물은 먼로 외에도 꽤 많다. 배우 앤절리나 졸리, 가수 마이클 잭슨,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까지….

 명단에 영국 다이애나 비(妃)가 들어 있어 좀 뜻밖이다. 하지만 그의 모순된 두 얼굴은 성폭력의 어두운 그림자 없이는 설명이 안 된다. 생기 넘치던 우아한 공주 이미지, 그 뒷면의 거식증·폭식증과 잦았던 자해(自害) 소동까지가 그의 실체다. 사실 그는 켄싱턴궁의 유리 옷장에 몸을 던지는 등 자해를 자주했다. 저자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주장이 이렇다.

할리우드 스타 메릴린 먼로 역시 8살 때 이웃청년에게 성폭행 당하고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사후 50주년을 맞아 올 봄 공개된 먼로의 사진. 1952년 먼로가 26살에 찍은 것이다. [사진 필립 할스먼]

 “지난 30년 수백 건의 자해 환자를 상담해온 경험으로 볼 때, 성적 트라우마의 가능성을 암시한다.”(111쪽) 저자는 재미동포 정신과 전문의. 미 알바니 의대 임상 교수를 지냈고, 현지에서 30여 년 개업의로 활동했는데, 풍부한 임상치료와 연구의 결산이 이 책이다.

 부제는 ‘인류가 숨겨온 가장 불편한 진실’. 아동성학대란 몇몇 폭력범의 예외적이고 천인공노할 범죄, 그 이상이며 때문에 구조적 악의 하나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 여성의 25%, 남성의 10%가 아동 성학대를 경험한다는 통계부터 그렇다. 미국은 여자아이 26%, 남자아이 16%가 근친상간의 표적이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던 ‘나영이’가 의외로 많다는 얘기다. 저자는 묻는다. “아동성학대에 인류 3분의 1이 연관됐다면, 이게 과연 질병일까.” 질병이 아니라고, 그럼 뭐지. 섹슈얼 트라우마는 인류 시작 이후 가장 만연한, 그러나 가장 알려지지 않은 범죄다. 그걸 알고 제대로 극복해나가자는 게 신간의 메시지다.

 상식이지만, 성 범죄에 안전지대는 없다. 가해자 다수가 가족·친지·이웃이다. 범죄가 신고되고, 처벌 받는 일도 미미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의 수준은 이 책에 비춰 매우 실망스럽다. 가해자 처벌에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가해자를 어떻게 화학적 거세를 하고 최고 형량을 때릴 것인가 등등.

 이에 따른 특별법 제정 움직임도 상대방을 모르고 흥분하는 격이다. 좀 더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며, 가해자 처벌만큼 피해자 치유와 구제 문제에 눈 돌려야 한다. 실제로 이 책은 희생자 치료의 매뉴얼로 꾸며졌다. 여기에 먼로·카프카·다이애나 비의 사례와 임상경험이 보태지며 설득력을 높이는데, 오해 마시라.

 이 책은 결국 폭력 잔혹사를 이겨낸 사람들의 휴먼스토리로 읽힌다. 그게 반전이고 백미인데, 끔찍한 휴유증에도 희망을 놓을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다. 즉 피해자가 주변의 도움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극복할 경우 상황은 꽤 달라진다. 그게 새로운 삶과 능력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들은 성적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트라우마 때문에 창조적 에너지를 발휘한 경우” 라는 것이다. 실제로 먼로의 경우 성적 매력 발산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뒷면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잘 균형을 잡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열광한다. 오프라 윈프리의 공감 능력, 다이애나 비의 이중적 매력도 마찬가지다.

 읽다 보니 『섹슈얼 트라우마』는 출간 타이밍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1, 2년 전에 나왔더라면, 괴상한 책으로 외면 당하지 않았을까. 주제가 좀 무겁지만, 인간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는 저술임이 분명하다.

 인간? 정말 수수께끼이고 다뤄도 다뤄도 끝이 없는 미궁(迷宮)이다. 외국 사례가 너무 많이 등장하지만, 동포학자의 서술이라서 그런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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