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누룽지는 남겨줘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서경호
경제부문 차장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못 말리는 야구광이다. ‘학구파’ 이미지와 달리 부산고 재학 시절에 대학 입시 부담을 감수하고 야구부 응원단장까지 지냈을 정도다. 그래선지 연일 ‘야구 화법’을 쏟아냈다. 지난해 6월 장관 취임 후 주재한 첫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재정부를 야구에서 수비 위치를 정해주고 투수를 리드하는 포수에 비유했다. 그는 “재정부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겠다”며 “포수처럼 가장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했다. 경제 5단체장과의 상견례 자리에선 “야구에서 희생타는 타율엔 인정이 안 되고 타점은 기록해 준다”며 “이런 규칙은 희생을 팀에서 값지게 받아들이는 징표”라고 했다. 당시 정부의 압박을 받아들여 유가와 통신요금 등을 내려준 기업에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올 5월 주택거래 정상화 방안을 발표하면서는 “삼진도 많고 홈런도 많은 이대호형 타자는 (대책에) 없다”고 말했다. 그 즈음부터 ‘스몰볼(small ball)’ 얘기를 자주 꺼냈다. 스몰볼은 장타가 아닌 단타·번트로 점수를 내는 야구다. 개인 플레이를 최대한 자제하고 팀플레이로 세밀하게 경기를 풀어나간다. 정치권의 추경 요구에 빅볼(화끈한 경기 부양) 대신 스몰볼(작지만 체감도 높은 대책)로 답한 셈이다. 지난주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선 “위기에 처하면 다른 선수들은 더 세게 던지려 하지만, 자신은 더 정확하게 던지려 한다”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 그레그 매덕스의 말을 인용했다. 더 꼼꼼하고 효과적인 정책을 주문한 거다.

 그 직후 나온 9·10 부양책은 예상보다 셌다. 취득세·양도세·개인소비세 감면 같은 세제 혜택이 포함돼 있어 스몰볼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해 취득세를 내렸다가 지방재정 보전 문제로 재정부는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도 박 장관은 결단을 내렸다. 스몰볼을 말하며 몸 낮춰 번트 자세를 취했던 그가 왜 갑자기 풀스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경기가 예상보다 나빠지니 그저 팔짱 끼고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내년 균형재정을 하겠다는 정부의 스탠스는 좋다. 곳간을 채워 차기 정부에 넘겨준다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균형재정이라는 제약조건 아래서도 정부는 맨땅에 헤딩하듯 올해 경기를 위한 부양책을 짜냈다. 매달 월급에서 과도하게 떼온 세금을 줄여준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미 이월·불용 예산을 최대한 줄이고 기금 여유 재원 등을 미리 당겨 쓴다는 발표도 있었다. 그냥 둬도 다 알토란 같은 내년의 정책 자원이다. 정부는 올해 쓸 수 있는 것은 정말 ‘알뜰하게’ 찾아내 정책으로 만들었다. 마치 밥솥 밑바닥을 박박 긁어 밥 한 톨, 누룽지 한쪽까지 다 꺼낸 것 같다. 쌀통의 쌀을 아끼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누룽지도 남겨두면 내일이나 모레의 괜찮은 먹거리다. 경제 관료의 능숙한 솜씨를 칭찬해야 할지, 정권 교체기에 야박해진 ‘누룽지 인심’을 탓해야 할지 갑자기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