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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아나키스트가 됐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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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뉴욕타임스는 아나키즘(anarchism) 이 부활하고 있다는 기사를 크게 실어 눈길을 끌었다. 세계화로 인해 초국적 자본과 세계 기구가 종래의 정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지배체제로 등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신(新) 아나키스트 그룹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요지였다.

책 소개를 이처럼 거창하게 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해방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에 가려 폄하된 '사회적 익명상태' 의 아나키스트들을 부활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이와 무관치 않아서다. 저자의 발문(跋文) 은 그 단서다.

"21세기에 아나키즘이 전 세계적 현상으로 확대된 것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가려졌던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가 전면에 떠올랐음을 보여준다. 지금에야 (아나키즘이) 현실의 사상이 될 수 있다. "

대중적 역사서의 한 모델이 될 만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근대 초입의 아나키스트 우당(友黨) 이회영(李會榮.1867~1932) 과 함께 그의 동료, 즉 '젊은 그들' 을 함께 재조명함으로써 아나키즘의 가치까지를 다시 묻고 있다.

이회영은 누구인가. 그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동생 이시영(李始榮) 과 함께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에 앞장서 온 인물(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이회영의 손자다) 이다.

조선 제일의 명문가 출신인 그는 일제의 침탈 직후인 1910년 기득권 모두를 포기한 채 일가 6형제 40여명을 이끌고 만주 망명을 결행한다.

이 때 가산을 정리한 40만원의 거금으로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1912년) 해 독립군의 요람으로 키웠고 고종의 망명 계획을 수립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한다. 태생적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아나키즘을 사상적 종착점으로 택한 것은 20년대 초 베이징(北京) 시절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예순을 앞둔 나이에 아나키스트로의 개종은 기적이었다. 그에게 신사상을 전한 '젊은 그들' 은 이을규.이정규.백정기.정화암.오면직.유자명 등이었다.

이회영은 32년 다롄(大連) 에서 의문사할 때까지 베이징.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등을 돌며 아나키스트들의 결사체인 의열단과 다물단 등을 지원했다.

또한 일제시대 가장 급진적인 선언문 가운데 하나인 '조선혁명선언' (23년.일명 의열단선언문) 을 쓴 거물 아나키스트 신채호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왜 그는 아나키스트가 됐을까. 김좌진의 동생이며 만주지방의 아나키스트였던 김종진에게 이회영은 이렇게 말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해방운동이나 혁명운동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고 운동자 자신들도 자유의사와 자유결의에 의해 수행하는 조직적 운동이다. 그 형태는 어떠하든지 사실은 자유합의에 의한 조직적 운동인 것이다. "

흔히 '무정부주의' 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권력과 제도를 거부하고 자발성과 평등에 기초한 공동체 사회를 이상으로 한다.

저자는 이회영이 상하이 임시정부 출범 당시 대세(大勢) 와 맞서 정부의 조직화를 반대했던 것은 이런 아나키즘의 영향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저자는 이런 아나키즘에서 약육강식의 세계화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 사상의 씨앗을 찾고, 기득권을 포기한 채 갖은 궁핍을 마다하지 않은 이회영의 삶에서는 오늘날 드문 '노블리스 오블리제(지배층의 엄격한 의무) ' 의 전형을 발견했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려 한 이 책은 대신 등장 인물들의 입체감을 살리는데는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독서시장이 목말라했던 대중 역사서로서의 가치에 크게 흠이 갈 일은 아니다.

▶저자 이덕일은…

이덕일(40) 은 현재 가장 활발하게 '역사의 대중화' 를 이끌고 있는 재야 사학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숭실대에서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강단사학' 에 합류하지 않았다. 대학이란 공간과 전문 연구서라는 매체의 협소함이 마뜩찮았기 때문이다. 대신 택한 '역사 에세이스트' 의 길은 성공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재해석한 『사도세자의 고백』(98년.푸른역사) 은 정설(定說) 의 토대가 된 『한중록』을 반박한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문제작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년.김영사) 에서는 송시열을 '조선의 주자(朱子) ' 가 아닌 '편협한 소인' 으로 몰아붙였다.

그는 이런 논쟁적인 대중 역사 저작물을 통해 '인간학으로서의 역사' 를 실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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