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일 잘 기억하는 시어머니 현관 번호 잊고 전화 못 걸면 혹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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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며느리 오미경(가명·55·서울 성동구)씨. 지난해 말부터 시어머니의 이상한 행동에 걱정이 늘었다. 외출 후 현관의 번호키 조작을 몰라 집 앞에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리모컨으로 TV를 켜거나 끄지만 채널 변경을 못해 같은 채널만 보신다. 손수 챙겨 드시던 라면도 끓이지 못해 도와드려야 한다. 이상한 점은 시어머니가 며칠 전 일은 깜빡하지만 10여 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창욱 교수(오른쪽)가 치매환자에게 일상생활수행능력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프리랜서 백지현]

기억력만 믿었다간 조기 치료 놓쳐

치매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기억력 저하다. 치매 환자는 뇌에 특정한 단백질이 쌓이거나 혈액 공급에 문제가 생겨 뇌가 손상된다. 이 영향으로 기억력 등 인지기능장애가 나타난다. 감정·언어·운동장애도 발생한다.

 하지만 단순히 기억력으로 치매를 판단하면 조기 발견을 놓칠 수 있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창욱(대한노인정신의학회 부이사장) 교수는 “치매환자의 인지기능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는 아침에 했던 일을 기억 못하는 등 단기기억력이다. 뇌에 새로운 기억을 입력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몇 년 전이나 수십 년 전 일은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기억력이 감소한 것만으로 치매환자라고 진단하지 않는다. 평소 혼자서도 잘하던 전화 걸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씻기 등 일상생활 수행능력이 함께 떨어져야 치매로 본다”고 덧붙였다.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현국 교수는 “일상생활 수행능력 저하는 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이 손상돼 발생한다. 치매를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척도”라고 설명했다.

 일상생활 수행능력 장애는 복잡한 일부터 쉬운 일까지 서서히 나타난다. 자동차 운전, 컴퓨터 사용이 힘들다가 결국 대소변을 못 가린다. 임 교수는 “독립적인 생활이 힘들고 누워 지내다 폐렴 같은 합병증이 찾아와 사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돈 관리·문 단속 하지 않아

일상생활 수행능력은 두 가지다. 기본적인 일상생활 수행능력과 도구 일상생활 수행능력이다. 기본 일상생활 수행능력은 대소변 가리기, 씻기, 식사하기, 옷 입기, 걷기, 계단 오르기 등이다. 치매가 한참 진행된 뒤 나타난다.

 반면 도구 일상생활 수행능력은 치매 초기에 관찰된다. 전화 사용, 물건 구입, 음식 장만, 돈 관리, 몸단장, 가전제품 사용, 약 복용 등이다. 평소 독립적으로 하던 일상인데 점차 스스로 소화하기 힘들어진다.

 예컨대 전화는 받지만 걸지 못한다. 증상이 심하면 전화받는 것도 힘들다. 물건을 고르거나 돈을 지불할 땐 누군가 도와야 한다. 금전관리나 문단속을 제대로 못한다. TV·세탁기·청소기·다리미 등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

 이 교수는 “65세 이상 노인의 도구 일상생활 수행능력 장애를 빨리 발견하면 치매가 중증으로 악화하는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걷기 운동 좋고, TV보다 라디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치매 환자는 2005년 8만3000여 명에서 2010년 26만1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완치법은 없다. 임 교수는 “조기 발견해 치료하면 병의 진행을 2~3년 늦추고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치료에는 약물요법과 비약물요법이 병행된다. 약물요법에는 인지기능과 일상생활 수행능력을 개선하는 치료제(‘엑셀론’ 등)를 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알약과 피부에 붙여 약효를 내는 패치제 형태로 나온다.

 비약물요법에는 인지재활 프로그램이 있다. 이 교수는 “레크리에이션과 작업·음악·미술치료 같은 재활프로그램을 받은 치매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는 병 진행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상생활에서 운동·두뇌활동·대인관계·정서적 안정을 취하면 치매증상 개선에 도움이 된다. 임 교수는 “걷기는 치매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땀을 약간 흘리는 정도가 좋다”고 말했다.

 뇌를 자극하는 활동도 챙겨야 한다. 이 교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하고 TV시청보다 라디오를 듣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취미생활 등 규칙적인 두뇌활동을 하지 않으면 치매 위험이 2.5배 높다는 보고가 있다.

 정서적인 안정도 중요하다. 이 교수는 “치매가 있다고 집에만 있기보다 대인관계를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며 “가족은 치매환자의 감정을 자극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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