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재벌논쟁이 경제 살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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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재계가 출자총액제한 폐지를 요구한 데 이어 14일 전경련이 33개 기업규제 완화책을 건의하자 정부와 민주당은 어제 바로 당정회의를 열어 수용불가 방침을 정했다.

민주당 이해찬(李海瓚)정책위의장은 재계를 비난하면서 기존 재벌 개혁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또 한나라당이 기업규제 완화를 요구하자 민주당은 이를 '재벌 옹호론' 으로 몰아붙였고, 이에 한나라당이 '재벌 해체론' 으로 맞서는 등 규제완화 문제가 정치쟁점으로 변질하고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대목은 정부.여당이 재계의 주장을 마치 정부의 권위와 개혁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출자총액제한 폐지 요구를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냐" 고 몰아붙이는 정치적 접근이 문제다.

물론 재벌이 외환위기에 책임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근본적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시장개방.금융정책과 방만한 외환관리에 있었다. 최근 경제가 죽을 쑤고, 사회가 혼란한 데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정치혼란의 책임이 큰데도 마치 모든 잘못이 대기업에만 있는 양 질타하는 것은 국면 호도용이라는 인상이 짙다.

물론 재계도 문제가 많다. 30대그룹의 타기업 출자비율이 지난해 4월 현재 32.9%로 25%를 훨씬 웃돈다. 또 일부 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解弛)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기업은 과거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개방경제 아래서 조금만 잘못하면 망하는 데다 안팎의 감시가 심해 전처럼 마음대로 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재벌정책도 원칙은 유지하되, 구체적인 방향에서는 발상의 전환으로 궤도를 수정할 때가 됐다. 기업활동과 오너 문제를 분리하라는 것이다. 기업의 활동은 최대한 보장하되, 오너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변칙 상속.증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투명경영.책임경영 문제를 상당히 해결할 수 있다.

출자총액제한도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25%면 재벌의 선단식 경영을 막을 수 있고, 26%면 안 되는가. 기업집단은 악(惡)이고, 개별 기업은 선(善)이라는 도식도 잘못된 틀이다. 게다가 잘하는 기업과 못하는 기업을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도 시장경제원리에 어긋난다.

이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대기업은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경영과 경제발전의 동반자라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경제회복이다. 기업인들이 신나게 뛰지 않고서는 투자 및 경기회복은 요원하며, 경기회복 없이는 실업해소와 사회안정이 불가능하다.

이런 절실하고도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놓고 재벌 옹호냐, 해체냐 하는 공리공론의 이데올로기 논쟁에 빠진다면 국력을 낭비하는 불행한 일이다.

대우차 노조도 전직 노조집행부가 대우차 정상화의 발목을 더이상 잡지 않겠다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정부.여당도 발상의 전환을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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