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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갚겠지” 대출 받자마자 먹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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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버스기사였던 박모(61)씨가 잠적한 건 2010년 10월. 잠적하기 석 달 전 그는 서울 한 신협에서 햇살론 600만원을 빌렸다. 신협에 박씨가 원리금을 제대로 갚은 건 단 두 달. 석 달째부턴 돈이 안 들어오고 감감무소식이었다. 담당자가 전화를 걸면 없는 번호라고 했다. 연락이 끊긴 지 넉 달 뒤 해당 지점은 그의 대출금을 부실 처리했다. 규정에 따라 박씨의 빚 보증을 섰던 신용보증재단이 493만원(대출 잔액의 85%)을 대신 물어줬다. 나머지 87만원(15%)은 신협이 떠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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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협 담당자는 “박씨의 대출 정보를 조회했더니 햇살론을 받아갈 무렵 카드·캐피털사 대출을 10곳 정도 받았더라”며 “한번에 여러 곳에서 돈을 빌려 잠적한 고의적인 사고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작정하고 돈을 떼어먹는 대출자들이 대표 서민대출 햇살론을 멍들게 하고 있다. 대출액이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 대부분 정부 보증으로 커버되다 보니 금융회사들도 빚 독촉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은 “무조건 대출을 더 해주라”며 모럴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를 되레 부추기고 있다.

 본지가 추적 조사한 전국 햇살론 1호 대출자 56명 중 연체자는 13명, 그중 5명은 대출 지점과 아예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7명은 넉 달 이상의 장기 연체나 개인파산 또는 개인회생, 신용회복지원을 신청했다. 결국 정부와 금융회사가 빚을 대신 갚아줘야 했다. 6월 말 현재 햇살론을 정부·금융회사가 대신 갚아준 비율(대위변제율)은 8.4%. 지난해 말(4.8%)의 두 배 수준으로 치솟았다.

 이렇다 보니 연체자 중 상당수가 처음부터 대출금을 떼어먹을 속셈으로 햇살론을 받아간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고 있다.

 강원도 또 다른 신협에서 2010년 7월 햇살론 600만원을 빌려간 최모(31)씨 예도 그렇다. 그는 대출 당시엔 고속도로 휴게소 계약직 사원이라는 점을 내세워 돈을 빌렸지만 대출을 받은 직후 직장을 나왔다. 버스기사 박모씨처럼 햇살론을 빌린 직후 카드·캐피털사 등에서 소액 대출로 모두 수천만원을 빌렸다. 그는 서너 달 정도 빚을 갚다가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

 그에게 햇살론을 내준 대부계 직원은 “빚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를 했더니 ‘개인회생 신청을 했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마라’고 당당하게 말하더라”며 “빚을 갚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전혀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서울 한 농협 담당자는 “햇살론을 받자마자 2, 3일 만에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 보증을 악용해 뻔뻔한 요구를 하는 대출자도 적지 않다는 것이 대출 담당자들의 얘기다. 한 저축은행 담당자는 “정부가 어려운 사람들 내주라고 만든 대출인데 네가 뭔데 안 빌려주느냐며 창구에서 욕설을 하는 이들도 있다”며 “아무리 서민대출이라지만 햇살론도 금융인 만큼 갚을 능력을 따진 뒤 빌려줘야 하는 게 기본인데 해도 너무하다”고 말했다.

 햇살론을 취급하는 제2금융권이 모럴 해저드를 방조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조사에서 13명 중 5명이 연락두절 상태였지만 돈을 빌려준 각 지점들은 이들을 찾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소액인 데다 잔액의 85%는 정부 보증이 되니 애써 품을 들여 채권 추심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융회사 측은 “일부러 안 찾는 게 아니라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채권 추심과 관련한 법률이 강화되면서 돈을 빌린 뒤 마음먹고 잠적하는 이들을 찾아내기가 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며 “전화번호를 바꿔도 바뀐 번호를 알아낼 길이 없는 판에 어떤 노력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건범 한신대(경제학과) 교수는 “햇살론 사고를 메우는 보증 재원은 정부와 금융회사들이 일대일로 출연해 마련한 자금인 만큼 사고가 나면 국민 세금으로 물어주는 셈”이라며 “금융회사는 대출 심사를 더 깐깐히 하고 사고가 나기 전에 적극적으로 채무 조정 등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애초 모럴 해저드를 피할 수 없는 구조였다는 지적도 많다. 박창균 중앙대(경영학과) 교수는 “정부가 보증하고 나서는 순간 저소득·저신용자들은 ‘당연히 받을 돈’으로, 금융회사에는 ‘안 받아도 큰 손해 없는 돈’으로 인식하게 된다”며 “같은 서민금융이라도 금융회사들이 자체적으로 돈을 모아 빌려줬다면 상업적인 판단으로 신용평가도 하고 적정한 금리를 매겨 부실을 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한계 상황의 서민용 대출인 만큼 일정 부분 손실은 감당하는 게 맞다는 입장이다. 이형주 금융위원회 서민금융과장은 “햇살론을 출시할 때부터 대위변제율이 20%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며 “대부업계 신용대출 연체율 역시 7%를 넘나드는 수준인 걸 감안하면 8%대 대위변제율은 저신용·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대출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서민금융=신용이 낮고 담보가 없는 영세 자영업자나 개인에게 빌려주는 소액 금융. 미소금융·새희망홀씨대출·햇살론이 서민금융 3대 상품으로 꼽힌다. 창업·운영자금을 빌려주는 미소금융, 생계자금을 빌려주는 새희망홀씨대출과 달리 햇살론은 생계자금·사업자금·대환자금·창업자금 등을 다양하게 빌릴 수 있다. 대부업체·캐피털사 등에서 연 20% 이상의 고금리 대출을 받은 경우엔 ‘바꿔드림론’을 신청하면 10%대 저금리 은행 대출로 갈아탈 수 있다. 신용회복지원을 받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을 당했다면 긴급소액대출을 활용하면 된다. 이외에 임금이 밀려 생계가 곤란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희망드림대출, 저소득·무주택자를 위해 금리를 우대해주는 보금자리론 등도 대표적 서민금융이다. 서민금융나들목 고객지원센터(1588-1288)에서 맞춤 상담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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