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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주자들, 문무대왕부터 만나봐야 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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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11면

여름은 잔인했다. 찜통더위 속에서 시민들은 에어컨에 생명줄을 대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사이 예비 전력은 블랙아웃 언저리에서 간당간당 적신호를 보냈고 가뭄까지 더해진 한강과 낙동강에는 녹조류가 번졌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④

백두옹의 여름 나기 비법은 방 안에서의 독서다. 그는 지나온 삶을 회상하고 복기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지만 좀처럼 글을 쓰지 않는 그로서는 독서가 차선책이다. 얼마 전까지 대선 후보들이 낸 책들을 밑줄 쳐가며 꼼꼼히 본 백두옹은 적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쓸 만한 참말은 적고 화려한 수사와 그럴듯한 거짓말들이 곧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책만으로는 검증하기 어렵다. 조만간 유력한 주자들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맹자가 옳았다. 눈빛을 마주 대하고 말을 섞어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이른 아침부터 초인종이 울린다.

“할아버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은강이가 방문을 열고서 이른다.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왜 유명한 논객 있잖아요. 진보·보수를 싸잡아 공격하는 분!”

뉴욕에서 살다 보니 은강이는 한국 사정에 대해 그리 밝지 못했다.

“강권 교수님예요, 할아버님!”

은강이 엄마가 현관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바쁜 사람이 어인 일인가?”

백두옹이 거실로 나오자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강 교수가 허리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 윤곽, 예리한 눈빛이 빈틈없는 당대의 논객답다.

“하도 답답해 어르신 모시고 바람이나 쐬려고요. 기력은 여전하시네요.”

강 교수는 백두옹의 붉은 안색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백두옹이 아끼던 제자의 아들이었다. 제자는 이미 고인이 됐고 그의 아들이 이렇게 장성해 이따금 찾아오곤 했다.

“그 성격에 요즘 정국, 참 답답하겠지.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오시게.”

“밖에 택시가 대기 중입니다.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죠?”

다짜고짜 강권이다.

“어딜 가려고?”

“저와 함께 바람 쐬시고 이따 저녁 무렵에 돌아오시죠.”

“그 사람 참!”

“할아버님, 어디든 함께 다녀오세요. 요즘 실내에만 계셨잖아요. 강 교수님이 오죽 알아서 잘 모시겠어요?”

외손자 며느리는 곧 옷가지와 모자를 꺼내놓는다. 집에서 나온 백두옹은 강 교수와 함께 서울역으로 달렸다.

“어딜 가는데 이러는가?”

“경주요.”

“그 먼데까지 왜?”

백두옹 같은 상노인에게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다. 그래서 강권 교수는 자동차 대신에 KTX 편을 택했다. 워낙 치밀한 그라서 매사가 똑똑 떨어졌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열차에 오른 둘은 특실에 마주 앉았다.

“피곤하시면 편하게 눈을 붙이세요.”

“나 아직 팽팽하다네. 그런데 경주에 누가 있나?”

백두옹은 손가락으로 두피를 두드려 마사지하며 묻는다. 정수리 부분의 모발이 약간 빠졌지만 여전히 빼곡한 백발이었다.

“대왕이 기다리고 계시지요.”

깐깐한 강 교수가 해설피 웃는다.

“생뚱맞게 대왕이라니?”

“동해 바다용이 되신 문무대왕요.”

“옳거니!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 가는 게로구나.”

백두옹이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이런 때는 늙은이가 아니라 꼭 소년 같다.

경주 감포 바닷가에서 본 한민족의 꿈

역시 촉이 빠른 노익장이라고 생각한 강 교수는 백두옹의 깊은 주름살 너머 형형한 눈빛을 응시한다. 지혜가 담긴 귀한 눈이다. 귀인이란 나이가 들어 꼬부라져도 추한 구석이 없어야 한다. 어차피 몸뚱이는 무너져 내리게끔 돼 있다. 인간의 고귀성은 불멸의 정신과 그 실천에 있는 것이다. 그게 빈약하니까 돈에 집착하게 된다. 돈마저 없으면 사람 대접 못 받으니까. 슬픈 일이다.

“이건 정말 궁금해 여쭙는 건데요. 세계 최고의 자살률, 만연한 성범죄와 정치 부패, 국가관과 역사의식 부재 상태가 지금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국민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지향점조차 합의하지 못한 분단국가죠. 그런데 무슨 수로 인류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선도한다는 건가요?”

열차가 한강철교를 건너자 강 교수는 푸르죽죽한 강물을 바라보며 조목조목 따지고 나왔다.

“늙은이가 입바른 소리 몇 마디 했다고 나도 공격하는 겐가?”

백두옹이 웃으며 강 교수를 건너다본다.

“공격이라뇨. 정말 궁금해서….”

“강 교수! 난 구한말부터 그 험한 꼴 다 보고 겪으며 살아왔어. IMF 경제위기 때 모두가 고생했고 내년에 퍼펙트 스톰이 온다고 야단이지만 이 나라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게. IMF 구제금융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가 놀라는 비약을 했단 말일세. 잠재력이 폭발하면 위기 속에서도 기적을 낳는 걸세. 산술적인 논리로는 내 말 이해 못해.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일정하게 자라는 건 아냐. 극적으로 점프하는 대목이 있단 말씀이지. 지나봐야 비로소 알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따져 물을 수가 없잖습니까?”

강 교수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철부지들 천지에 내가 뭔 얘기를 해.”

백두옹은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아버린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중은 때를 알고 그때마다 필요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때를 모르면 헛수고일 뿐이다. 때를 모르고 나대면 철부지가 된다. 철부지(<5C6E>不
知)는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다. 철(<5C6E>)은 싹이 돋아나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다. 싹이 트는 때도 모르고 나대는 어린 것이나 어리석은 이를 가리켜 철부지라고 한다. 철부지들이 공개석상에서 국사를 논하고 감히 한 나라를 다스려 보겠다고 설친다. 그들이 열매 맺는 때를 알 리 만무하다. 답답하다.

3시간 뒤 그들은 경주 감포 바닷가 이견대에 도착했다. 언덕배기 정자에 서자 바닷속 문무대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왜구들이 수시로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화장한 그의 분골은 바닷속 바위에 안장된다. 오죽 골칫거리였으면 삼한강토를 통일한 대왕이 동해 수중릉에 묻히길 원했을까. 대왕의 아들 신무왕은 감읍해 근처에다 감은사를 세웠다. 그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신기한 피리, 만파식적을 얻는다. 이에 대왕암이 보이는 언덕에 이견대를 세웠다. 이견대(利見臺)는 건괘 2효와 5효의 이견대인(利見大人·대인을 만나보면 이롭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2효는 재상이 될 현자이고 5효는 제왕에 해당한다.

대통합의 국가 리더십 발휘해야
“어르신, 저는 주역의 말씀처럼 대선 후보들이 언제 어떻게 대인을 만나보느냐에 따라 판세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머잖아 문재인,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 야권 후보와 안철수가 삼고초려 형식으로 만나 대권 드라마를 연출할 것 같지 않습니까? 문왕과 강태공, 유비와 제갈량, 정도전과 이성계처럼요.”

“이곳 이견대에 와서 청와대 새 주인이 될 이가 만나봐야 할 대인을 가늠해본다? 안철수가 대인이라…. 그거 재밌는 걸!”

백두옹은 강 교수가 주선한 이견대 여행이 뜻깊다고 생각했다.

“박근혜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대선을 ‘남북전쟁과 슬픈 용병들’로 정리합니다.”

“뜬금없이 웬 남북전쟁이누? 선거철 돌아오니 또 그놈의 지긋지긋한 지역감정 타령인가?”

“그게 아니고요. 문재인, 김두관, 김태호, 안철수의 경남과 박근혜의 경북! 경남과 경북의 대권 싸움에 호남인이 앞다퉈 용병으로 나서지만 별로 얻을 건 없다는 것이죠.”

예리한 통찰이라고 여기는 듯한 강 교수를 향해 백두옹은 혀를 끌끌 찬다.

“이 사람아, 어느 때보다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에 남북전쟁이니 슬픈 용병이니 하는 표현들은 옳지 않아. 독도가 바로 저 바다 너머지?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독도 방문을 결행했는데 그거 어떻게 생각해?”

“주도면밀한 일본이 분쟁지역화할까 걱정이네요. 외교적으로도 득보다 실이 클 거 같고요.”

“그런가? 문무대왕은 뭐라 하실까? 아마 백 번 잘한 일이라고 하실 거네. 대통령이 우리 영토에 갔는데 그게 왜 문제가 돼? 대왕께서는 더 당당해지라고 주문할 거네.”

백두옹은 단호했다.

“결정적일 때 써야 할 마지막 카드를 국면전환용 이벤트로 써먹어버렸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 사람아, 이해(利害)가 걸린 문제는 시비(是非)부터 따지는 게 원칙이야. 옳으면 취하고 그르면 버리는 게 군자고 신사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온 역사가 어언 1500년이네. 임진왜란과 한·일강제병합이 대표적이지. 그래 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의 역사 접근 태도가 문제야. 우리야 힘이 약했던 죄밖에 더 있어?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우리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들 거야. 두고 보게. 우리가 약해지면 반드시 준동할 거네. 치욕스러운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던 적이 있는 이 늙은이 말 허투루 듣지 말게. 나는 그만그만한 대선 후보들이 맨 먼저 만나봐야 할 대인은 문무대왕이라고 보네. 후보들이 여기 와서 문무대왕께 맹세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는 혈연·지연·학연·정파 다 떠난 대통합의 국가 리더십을 발휘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남북을 통일하고 일본을 능가하는 문화강국의 초석을 다지겠노라고 말이야. 그게 독도 문제의 해법이야!”

목에 핏대를 올린 백두옹은 연방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러다 손으로 입을 훔쳤는데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아, 어르신!”

소스라치게 놀란 강 교수가 백두옹을 부축했다.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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