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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의 책과 세상] 탈식민주의…

중앙일보

입력

달콤쌉쌀한 맛이 일품인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아시는가? 느른하면서도 섹시한 그 맛을 나는 달리 표현할 재주가 없어 남의 입을 빌리려 한다. "야수성과 관능이 함께 녹아 있는 그의 탱고 음악은 라틴 아메리카의 영혼을 꼭 닮았다.

그 음악의 충격은 보르헤스, 마르케스 등의 문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서구의 편협함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과도 흡사하다. " 아스토르 피아졸라에 대한 서구의 열광이 가늠될 발언이다. 아시겠지만 피아졸라의 음악은 콘서트홀 용이다. 따라서 대중음악 탱고와 전혀 다르다.

앞의 인용은 '탱고 짝사랑' 에 푹 빠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의 유명한 앨범 '피아졸라 예찬' (논서치 레이블) 에서 뽑아본 글이다. 이 음반에 해설을 쓴 존 애덤스라는 위인은 탱고가 '이국적 미약(媚藥) ' 이라고 극찬하는데, 나도 그런 매력에 백번 동의한다.

크레머의 탱고 시리즈는 물론, '피아졸라의 뉴욕 센트럴파크 라이브' (체스키 레이블) 와 '피아졸라 전집' (벨라 뮤지카) 을 컬렉션해둔 내 경우 탱고를 이렇게 정의하려 한다.

'육체성, 혹은 몸성(性) 을 가진 대안(代案) 음악의 하나' . 무슨 말인가 하면 근대적 에고(내면) 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제3의 음악 말이다. 즉 머리.가슴은 물론 인간의 몸 전체까지 아우르는 '보디 뮤직' 내지 총체적 음악이 탱고다.

그것은 전통 국악 고유의 신명 내지 흥취와도 통하는 요소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판단에 문제가 생겼다. "보라, 제3세계 음악도 만만치 않지?" 했던 내 판단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그건 책 때문이다.

얼마 전에 리뷰기사를 내보냈던 『탈 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가 그 책이다. 제3세계의 탈 식민주의 흐름을 정리한 이 이론서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저자인 프란츠 파농 등의 제국주의 비판이 최근 서구지식인 지도 속에 어떻게 편입됐나를 보여준다. 즉 중심부 진입까지는 좋은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혼합되면서 '뾰족한 가시들' 은 왕창 뽑혀버렸다는 것이다.

즉 본래의 탈 제국주의의 전복적 성격은 거세됐고, 세련된 탈근대 이론의 지류 정도로 탈바꿈했다는 얘기다. 영국인 저자인 바트 무어 길버트(런던대) 와 번역자인 이경원(연세대) 교수는 그런 탈식민주의 이론들의 어정쩡한 위상을 '서구의 입양아(入養兒) ' 라고까지 표현한다.

제3세계에서 제기되는 여하한의 지적(知的) 움직임도 전 지구적 자본주의 문화라는 잡식성 공룡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싹쓸이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탱고음악이란 것도 '서구 클래식의 입양아' 라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탱고에 빠진 나란 위인은 영문도 모른 채 서구 음반자본의 돈주머니나 채워주는 '동아시아의 촌놈' 이라는 얘기이고…루쉰(魯迅) 의 말로 '넋나간 阿Q(아큐) ' 가 따로 없을 것이다. 꼴은 거지이나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고 굳게 믿는 우스운 아큐 말이다.

문제는 1백년 전과 달리 요즘의 아큐들은 제법 배도 부르다. 솔직히 밝히자면, 나는 우리네 문화상황 전체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다. 해서 나의 탱고 취미부터 도마 위에 한번 올려놓은 것이다. 다음 회에서는 국내 학문을 '기지촌 학문' 이라고 몰아붙이는 김영민교수의 고민을 마저 들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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