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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 영어교육 대신 부자 아이 무료급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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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민상
사회부문 기자

2일 오후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중학생들이 모이는 서울 응암동의 한 공부방. 영어 원어민 교사 로버츠(33)가 들어서자 아이들이 달려 나가 맞았다. 로버츠는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교실은 학생 30여 명으로 가득 찼다. 문밖에선 학생 10여 명이 고개를 빼고 수업을 들었다. 중학교 2학년 김모(13)군은 “학교 원어민 선생님이 이번 여름방학부터 계약기간이 끝나 본국으로 돌아갔다”며 “다행히 로버츠 선생님이 공부방에 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년부터 서울에 사는 저소득층 학생들이 원어민 교사의 수업을 받을 기회는 훨씬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교육청이 중·고교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를 없애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독해와 문법 비중이 커지는 중·고교에서는 원어민 교사의 수업 효과가 떨어지고, 영어 회화에 능숙한 한국인 교사가 많아져 예산을 없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사교육을 받기 어려운 저소득층 학생들의 실상을 외면한 정책이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감은 “영어는 돈을 얼마나 들이느냐에 따라 성적이 나온다”며 “소득 격차에 따라 능력 차이가 벌어지는 영어 디바이드(English divide)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시교육청의 정책은 말하기와 쓰기 영역을 강조하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입장과도 배치된다. 교과부 영어교육정책과 관계자는 “의사소통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고교 교육에서 실용영어는 중요하다”며 “원어민 교사를 없애는 서울시교육청의 결정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교과부는 말하기와 쓰기 영역을 강조한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EAT)’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을 대체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 때문에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부터 영어 토론 바람이 불고 있다. 강남의 한 영어학원 원장은 “어릴 때부터 영어로 논리적인 주장을 펴는 훈련을 해야 짧은 시간에 말하기와 쓰기를 해야 하는 NEAT에 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능 영어가 NEAT로 대체되면 원어민을 접할 기회가 적은 저소득층 학생들은 학원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아이들에 비해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의 문은 좁아지고, 계층 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문제는 서울시교육청이 무상급식 예산을 늘리면서 교육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무상급식 전면 확대 이전부터 급식을 지원받아 왔던 저소득층 아이들 입장에선 배움의 기회만 점점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