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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곳에서 ‘컷’ ‘컷’ … 촬영감독한테 핀잔 좀 들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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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침침한 눈과 시큰거리는 무릎, 성긴 머리칼을 무슨 수로 숨길까. 무엇보다 꿈이 사라지는 것만큼 나이듦을 실감케 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김동호,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여섯인 이 남자의 삶은 이런 공식을 거스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양 나이가 들수록 꿈이,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진다. 지난 15년간 열과 성을 다해 키웠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자리를 주저없이 떠난 지 2년여. 근황이 궁금했는데 그리 길지 않은 휴식 끝에 오랜 시간 꿈꿔온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단다. 최근 단편영화 ‘주리(JURY)’의 촬영을 마친 그를 JTBC 시사토크쇼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29일 오전 7시40분 방송)가 만났다.

데뷔 작품 제작비는 2300만원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듯싶었다. 올해 일흔여섯의 나이에 영화감독의 꿈을 이룬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했다. [김성룡 기자]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부터 키우신 건가요.

 “1996년부터 해마다 칸 영화제에 갔어요. 레드 카펫 밟으며 배우와 감독들이 입장하는데 관객들로부터 더 큰 박수를 받는 건 감독이더라고요. 그래서 기왕 영화인이 된 김에 한 번쯤은 자기 영화 들고 레드 카펫 밟는 감독이 되고 싶었죠.”

●이번에 찍은 영화는 어떤 내용인가요.

 “그동안 여러 영화제에 심사를 하러 다니며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심사 과정에서 서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말이죠. 마침 올해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가 10주년을 맞아요. 그런데 영화제 집행위원장인 배우 안성기씨가 개막작으로 심사위원들 얘기를 담은 영화를 연출해 달라기에 ‘그거면 해볼 수 있겠다’ 싶어 수락했지요.”

●어쨌든 ‘신인 감독’의 데뷔작인 셈인데 출연진과 제작진 면면은 블록버스터 영화 수준입니다(이 영화의 주연은 안성기·강수연씨. 임권택 감독과 손숙씨가 엑스트라. 거기다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조감독, 강우석 감독과 ‘살인의 추억’의 김형구 감독이 각각 편집과 촬영을 맡았다).

 “영화제에 돈이 별로 없으니까 평소 친한 지인들에게 재능 기부를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기자재 빌리는 데 드는 최소한의 비용 2300만원은 영화제 쪽에서 대줬지요.”

●스태프로 참여한 베테랑 감독들한테 핀잔은 안 들으셨나요.

 “첫날은 어느 장면에서 ‘컷’을 외쳐야 할지 몰라 김형구 촬영감독에게서 ‘헷갈린다’는 소리를 좀 듣긴 했지요. 그래도 제가 임권택 감독이며 홍상수·이창동 감독의 촬영 현장에 워낙 많이 가봤기 때문에 감이 좀 있어요.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제대로 했죠.”(웃음)

부산국제영화제 성공 위해 온 몸 바쳐

밑의 사진은 JTBC 시사토크쇼 녹화 현장. [김성룡 기자]

●부산국제영화제 얘기를 좀 해보죠. 96년부터 2010년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아 ‘문화 불모지’라는 부산에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영화제를 만드셨습니다. 초반엔 반대가 무척 심했다면서요.

 “제가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친 직후인 95년 8월 18일이었어요. 제 뒤를 이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용관 당시 중앙대 교수와 현재 수석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씨 등 젊은 영화인 네 명이 찾아왔더군요. 자기들이 부산에서 영화제를 하고 싶은데 집행위원장 자리를 꼭 맡아달라고요. 원래 영화제에 관심도 있었고 젊은이들 열성이 대단해 보여 주변에서 모두들 안 된다고 말리는데도 결심했어요. 제 인생을 바꾼 ‘8·18 회동’이었죠.”

●‘김동호 위원장이 없었다면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불가능했다’는 게 정설인데요.

 “외부 간섭을 막는 역할은 했어요. 지방자치단체든 정부든 예산 지원을 해주되 ‘감 놔라 배 놔라’는 하지 말라는 거죠. 일례로 제1회 영화제부터 축사는 다 없앴어요. 장관도, 국회 상임위원장도 전부 배제하고 부산시장도 환영사 없이 개막 선언만 하게 했어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축하 메시지도 영상으로 받아 틀었죠. 3회 때부턴 대통령 메시지도 싹 없애버렸어요.”

●정치권에서 괘씸해하지 않던가요.

 “2회 때 여야 대선후보인 이회창·김대중 후보가 오셨지만 소개나 축사는 절대 하지 말라고 간청했더니 들어주셨습니다. 올해도 대선 후보가 다들 오시려고 하겠지만 이미 정치권에 이런 사실이 다 알려져 있어 양해하실 걸로 봅니다.”

●당국의 검열 시도도 막아주셨다면서요.

 “새로 만드는 영화제가 검열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냥 죽는 거예요. 영화제의 존폐가 달려 있으니 꼭 막아야 했죠. 프로그래머들이 선정하는 영화는 무조건 상영하게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진다는 식이었죠.”(공연윤리위원장 시절에도 그는 영화의 완성도를 해칠 수 없다며 ‘크라잉 게임’에서 당시로선 금기였던 성기 노출을 허용했다.)

●영화제의 크고 작은 문제를 술로 풀었다는 얘기가 유명한데요.

 “개막식이 끝나면 남포동 자갈치시장에 있는 포장마차를 다 돌면서 거기 있는 국내외 영화인들과 술을 한잔씩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눴어요. 그 다음엔 해운대로 넘어가 거기 포장마차를 또 순례했고요. 새벽 4시쯤 숙소로 돌아가는데 한 시간 자고 일어나서 해변가 한 바퀴 뛴 뒤 공식 일정을 소화하곤 했지요.”

●하루에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가요.

 “소주로 70~80잔은 되지 않을까요, 허허. 10회 영화제까지만 그렇게 마셨고요. 술을 더 안 마셔도 영화제가 잘 굴러갈 것 같아 2006년에 마침 우리 나이로 70살도 되고 해서 술을 딱 끊었어요. 그 이후론 한 방울도 입에 안 댑니다.”

정치엔 관심 없어 … 인재 양성에 전념할 것

●그렇게 온몸을 바쳐 키운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난 뒤에도 영화계를 위한 뜻깊은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데요.

 “지난해 10월 20일 출범한 ‘한국영화 동반성장협의회’를 이끌고 있어요. 대기업과 중소기업, 영화 관련 단체 대표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죠. 9개월의 토의 끝에 열악한 스태프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저예산 독립영화도 일정 기간 상영을 보장해 주자는 합의문을 얼마 전 발표했습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영화계에서 이만큼 합의를 이룬 것 자체가 큰 성과라고 봐요.”

●차세대 영화인들을 키우는 교육도 시작하셨죠.

 “올봄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장을 맡게 됐습니다. 최고의 강사들이 실습 위주로 가르치고, 졸업할 땐 팀을 짜서 장편영화를 한 편씩 만들도록 할 계획입니다.”

●넓은 인맥 덕분에 화려한 강사진을 모셨을 것 같습니다.

 “연출 쪽으론 ‘친구’의 곽경택 감독,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 등이 참여했고요. 프로듀서 쪽은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 사이더스의 김미희 대표 등이 있죠.”

●교육도 중요하지만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정부 지원도 필수적일 텐데요. 이명박 정부의 영화 정책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정부 들어 독립영화 전체를 좌경시하면서 입지를 좁혀놓은 건 유감입니다. 인디스페이스라는 독립영화 전용관을 문닫게 한 게 대표적이죠. 그래서 저를 비롯한 영화인 몇몇이 모금을 해서 지난 5월 새로 전용관을 열기도 했습니다.”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영화계를 돕겠단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부산에서 출마하시면 몰표가 나올 텐데요. 정치권에서 러브콜은 없었습니까.

 “저는 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전념해야 하니까요.”

●지금은 영화계 큰어른으로 통하시지만 원래 관료 출신이신데요. 어쩌다 영화랑 처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취직이 급선무였는데 마침 공보부가 요원을 모집하더군요. 이후 문화공보부, 문화체육부, 문화부로 변천을 겪으며 쭉 관리 생활을 했죠. 그러다 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가게 됐어요. 부임하자마자 3개월간 매일 점심·저녁 시간마다 사비를 들여 영화계 사람들을 두루 만났죠. 가장 시급한 게 종합촬영소라기에 남양주 촬영소 짓는 일에 올인했지요.”

●판공비는 어쩌고 사비로 밥을 사셨어요.

 “저는 평생 어떤 자리에서도 판공비나 법인카드를 써본 적이 없어요. 제 월급으로 밥 사고 술 사고 했습니다. 강남 요식업계 진흥에 꽤나 기여했죠.(웃음) 아내가 약국을 하는 덕분에 공직 생활 편하게 했습니다.”

●공직에 몸담고 계시다 50대에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셨고, 70대 중반인 지금 감독과 교육자로 인생 3막을 여셨는데요. 멋지게 나이 드는 법을 좀 귀띔해 주시죠.

 “계속 새로운 일을 찾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일을 하다 보니 영어가 필요해 51살 때 고등학생들과 섞여 앉아 영어학원 수업을 듣기도 했어요.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영화도 더 만들고 싶고, 그림·서예 등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아요.”

 그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1시간씩 운동하고 주말이면 테니스를 치며 체력을 다진다는 김동호 위원장. 적어도 그에겐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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