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혁명가 백남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여기 한 남자의 데드마스크가 있다. 꾹 다문 입술에 계란형 얼굴, 잘 생겼다. TV 모양의 플라스틱 선글라스를 썼다. 죽음조차 갖고 노는 여유가 보인다. 데드 마스크는 연두색 테두리의 TV 안에 잠겨 있는데, 주변엔 일본어 철학책에서 북 찢어 구긴 종이조각, 잎사귀와 꽃, 돌,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따위가 깔려 있다. 파란 물감으로 한자 ‘革(혁)’자와 ‘命(명)’자를 선명하게 썼다. 각각 그랜드 피아노 모형과 지구본 위에 적었다.

 그렇다. 이 남자는 백남준(1932~2006)이다. 작품은 그가 57세 되던 1989년 만든 자화상. 그는 1932년 서울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유치원 친구인 수필가 이경희씨는 “그 시절 서울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남준이네 거라 했다”고 회고했다. 유년기에 피아노를 배웠고, 홍콩의 영국계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6·25 때 일본에 가서 도쿄대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표현주의 음악가 쇤베르크(1874~1951)에 매료돼 독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63년 독일에서 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 전시로 기록됐다.

자화상의 철학책, 그랜드 피아노 모형은 자신이 받은 교육을, TV와 비디오테이프, 꽃과 나뭇잎은 자연과 기술의 만남, 기술의 인간화를 추구한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서울·도쿄·뉴욕·뒤셀도르프 등 각지를 돌아다닌 유목민 같은 삶은 지구본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革命(혁명)’ 한마디로 축약했다. 스스로를 혁명가라 부른 것이다. 기성 체계를 박살내고 더 자유로운 인류 보편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게 그의 꿈이었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오랫동안 우리는 그를 이렇게 규정해 왔다. 앞서간 그의 예술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 “예술은 사기” 혹은 “클린턴 미 대통령 앞에서 엉덩이를 깠다더라”는 기행만이 공허하게 남았다. 미래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그의 저술이 국내에 출간된 것도 최근 1~2년 새 일일 뿐. 몸보다 명성이 먼저 돌아온 예술가, 백남준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아직도 많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1965년 그는 ‘자서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2012년 7월 20일, 그는 80세 생일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