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깨뜨리는 유쾌함 정성화 게이 연기 발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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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런 우람한 체구로도 여자를 연기하다니. 정성화는 꽃미남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게이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사진 악어컴퍼니]

하반기 최고 화제작이라는 뮤지컬 ‘라카지’(원제 La Cage Aux Folles·새장 속의 광인)를 5일(김다현·고영빈 출연) 관람했다. 실망스러웠다. 공연장을 빠져 나오며 ‘토니상 작품상 세 번 받은 거 맞아?’싶었다.

 그래도 다른 캐스팅은 어떨까 싶어 7일(정성화·남경주 출연) 한 번 더 봤다. 딴 작품인 줄 알았다. 대사가 귀에 쏙쏙 박히고, 극의 감정선도 자연스러웠다. 캐스팅에 따라 이토록 출렁인다면 이건 명작일까, 범작일까.

 정성화는 기대대로 탁월했다. 이미 연극 ‘거미 여인의 키스’를 통해 게이 연기에 남다른 자질이 있음을 보여준 그였다. 이번에도 뻔뻔하리만큼 동성애자 역할을 잘 소화했다. 특히 1막 마지막 부분에 부르는 ‘나는 나일 뿐’은 가슴을 뻥 뚫어줬다. “차기 뮤지컬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작품은 게이 클럽을 배경으로 한다. 클럽을 운영하는 조지와 클럽의 메인 배우 앨빈, 둘은 게이 커플이며 아들도 있다. 사건은 그 아들이 성장해 이른바 ‘보수꼴통’ 집안의 딸과 결혼하려고 하면서 비롯된다. 어르고 달래고 속이는 좌충우돌 속에 유머가 배어 있고, 눈이 즐거우며, 가슴 찡한 구석도 있다.

 ‘라카지’는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다. 언제부턴가 국내에선 영화·드라마·뮤지컬 가릴 것 없이 동성애 코드를 유행처럼 삽입했다. 대신 거기에 등장하는 동성애자는 꽃미남이었다. ‘소수자 인권’과 같은 진지한 담론은 사라진 채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기 바빴다.

 하지만 ‘라카지’는 달랐다. 쇼라는 장치를 가미시켜 순화시키긴 했지만, 동성애자의 삶과 번민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다룬다. 국내 팬에게 조금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소재를 과감히 택했다는 점만으로도 ‘라카지’는 진일보한 뮤지컬임에 틀림없다.

 이미 ‘아가씨와 건달들’을 통해 쇼 뮤지컬의 문법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이지나 연출은 이번에도 역량을 발휘했다. 물론 아쉬운 대목도 있었다. 과연 게이 클럽의 다양한 쇼가 늘씬한 여성 무희나 매튜본의 근육질 남성 군무만큼 경쟁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2막 후반부 허겁지겁 갈등을 봉합시키는 장면은 억지스러웠다. 그럼에도 ‘라카지’는 오랜만에 보는 완성도 높은 라이선스 신작이었다. 금기를 유쾌하게 깨뜨리는 ‘B급 뮤지컬’로 자리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 뮤지컬 ‘라카지’=9월 4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6만∼13만원. 1566-7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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