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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진정 반성문을 쓸 사람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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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이 ‘반성문’을 썼다. 이명박 정부를 만들어 낸 주역 중 한 명으로 이상득 전 의원의 몰락을 지켜본 비애감에서다. 최근 한 주간지에 실린 반성문의 마무리는 대충 이랬다.

 “이 대통령이 누구보다 빠르게 레임덕에 직면했고 급기야 실패한 대통령으로 내몰리는 게 아닌가 싶어 솔직히 나는 두렵다. 이중 그림자 권력구조를 막지 못하고 방치하고 조장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나라는 게 괴롭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한 형님의 권력욕, 형제간의 우애와 국정의 엄중함을 구분하지 못했던 동생의 우유부단… 좋은 게 좋다는 친이(親李)들의 비겁함, 너의 실패는 나의 성공이라며 팔짱만 끼고 사태를 즐기던 친박(親朴)들의 수수방관, 불퇴전의 각오로 끝까지 싸우지 못했던 쇄신파의 용기 박약….”

 그는 ‘용기 박약’ 쇄신파의 일원이다. 2008년 3월 이 전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한 55인 중 한 명이었다. 그해 여름 권력 사유화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뜻을 같이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작금의 민심 이반은 대통령 등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심판”이라고 외쳐 권력 핵심의 눈총을 받았던 이도 그였다.

 어쩌면 그는 여권 내에서 반성문을 써도 가장 마지막에나 쓸 사람일 거다. 하지만 가장 이른 그의 반성문을 보며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2008년 초 어느 날 김장수 전 의원과 이 전 의원이 인사를 나누는 걸 목격했다. 김 전 의원은 노무현 정부의 국방부 장관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면서 단 1도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 직후 기자들에게 “악수를 할 때 고개를 숙이면 부딪칠 게 아니냐”고 했다. 그의 ‘해명’이 사실이 아니란 걸 아는 데 1초도 안 걸렸다. 이 전 의원의 손을 잡은 채 하염없이 내려가는 그의 머리를 보며 역으로 치솟은 이 전 의원의 위상을 실감했었다.

 한 관료와의 만남도 있다. 이 전 의원의 자원외교에 동행했던 그는 기자의 취재에 응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직업공무원으로 갈 데까지 갔다. 이번에 잘 보일 게 없다. 그런데도 이 전 의원의 활동상을 보니 나름대로 속된 말로 (대통령) 친·인척의 롤모델 같더라. 정말 본인이 대통령이 직접 하기 힘든 일을 풀어주고.” 진심인 듯 말했다. 아니 진심이었을 거다. 권력이 진심도 만들어 낸다는 걸 그날 알았다.

 뭐니뭐니해도 곱씹고 곱씹게 되는 건 2008년 6월의 일이다. 말을 빼면 빼도 보태지 않는다는 평을 듣던, 친이계 중진 안경률 전 의원이 이 대통령과 만나고 나온 뒤 말을 전했다. 권력 사유화 발언으로 시끄럽던 당을 향해 이 대통령이 전한 메시지였다.

 “일부 의원의 묻지마 식 인신공격 행위와 발언들이 걱정스럽다.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는 일은 자제해야 된다. 나하고 저하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나한테 와서 말하면 되는 것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가 서로 사랑이 조금 부족했느냐.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려는 우리들이 성숙한 인격이 모자라는 것은 아닌지….”

 이 대통령은 그날 확실히 ‘형님’의 손을 들어 줬다. 권력투쟁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실력자와 맞서려면 무모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용기’를 내야 하고 그건 명분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란 걸 인식하지 못한 거다. 역대 대통령이 초기에 그러했듯 일가(一家)의 의혹에 대해 “남의 음해”라고 여겼을 수도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동생의 도리”를 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만일 이 대통령이 당시 정반대의 목소리를 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 전 의원이 그토록 오랫동안 독점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이 대통령이 그 후에라도 경계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 전 의원이 검찰의 수사를 피하진 못했을 순 있다. 그게 역대 대통령 친·인척의 숙명이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상왕(上王)’이란 얘기를 들으며 서초동으로 향하진 않았을 거다.

 그러고 보니 정작 반성문을 써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 바로 이 대통령이다. 가장 길고 솔직하고 절절한, 그래서 후임 대통령에게 ‘약’이 될 법한 얘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