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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이룬다는게 내 인생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실적 부진이 어느 정도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졌던 걸까? 독일 본사는 전임 사장이 퇴임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의 영입을 발표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역시 본사의 파격 못지않은 리더 역할을 통해 ‘한국 진출 6년만의 최고 전성기’를 창출해냈다.

“Spiritual Leader가 돼야합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되겠다는 말인가? 웬 종교집단인가 의아해 하겠지만, 결코 아니다. 오히려 최첨단을 걷고 있는 세계적인 IT기업의 한국 지사장이 위기에 빠졌던 회사를 살려낸 뒤 자신감 있게 뱉어내는 나름의 ‘자질론’이다.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회사를 불과 3개월만에 다잡아 세웠다. 그리고 이제 취임한 지 정확하게 1년을 채우면서 SAP코리아는 한국 진출 6년만에 최고의 시기를 맞고 있다.

부드러운 인상과 훤칠한 키의 최승억 대표(44)를 도곡동 군인공제회관 28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봄볕이 만연했던 날 늦은 오후, 창 밖으론 어느덧 황금빛 노을이 밀려들고 있었다. 모 월간지와의 표지 촬영 때문에 얼굴 분장까지 했었다는 그는 쑥스러운 듯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재빨리 화장을 지웠다”고 말한다. 긴장했던지 이마엔 미세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최승억 대표 약력

  • 1957년 1월 20일生
  • 1981년 중앙대 기계공학과 졸업
  • 1985년 미국 페어레이 디킨슨 대학교 기계공학 석사·1988년 동 대학원 E-MBA
  • 1984년 KKL 컨설팅 Senior Management
  • 1988년 CEI 비즈니스컨설팅 대표
  • 1991년 KPMG 컨설팅 Managing Director
  • 1998년 (주)한국오라클 부문장/상무
  • 2000년 (주)SAP코리아 대표이사

  • “과거의 일은 다시 들추고 싶지 않습니다. 언론에서도 이제 그만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웠던 그의 인상이 잠깐 굳어지면서 숨겨져 있던 강한 눈빛이 뚜렷해졌다. 민감했던 문제인 데다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게 불과 며칠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자세한 것은 묻지도 말고 기사로도 쓰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사실 인터뷰를 하면서 아픈 과거를 묻는 것만큼 기자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업계에서의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가 작년 4월 초 SAP코리아의 신임 대표이사로 전격 발탁된 것은 전임 대표의 실적 부진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런데 당시까지 그는 전사적 자원관리(ERP) 업계의 유일한 맞수 오라클의 상무이사로 2년 남짓 근무하던 터였다. 회사 내부에서는 본사의 공식 발표 3일 전에야 그의 영입 사실을 알았으며, 본사에서도 미처 퇴임하지 않은 전임 사장과의 1개월 공동 경영체제를 지침으로 하달했을 정도.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오라클의 ERP사업을 진두지휘하면서 한국통신과 포스코 등 굵직굵직한 사업실적을 올렸고, 그 결과 99년도 업계 1위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성과를 세웠던 게 본사의 신속한 영입 결정 배경이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

    하지만 이 때의 이적(移籍) 때문에 오라클은 결국 ‘취업금지 및 경쟁업체의 영업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한 동안 양 업체간의 날카로운 설전과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법원이 오라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법적 시한이 종료된 며칠 전까지 회사가 매일 수십만원씩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 일개인을 두고 빚어졌던 작년의 이 송사는 업계의 화두였다. 불미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했던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CEO는 돈·사람·기술 지원하는 존재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CEO의 필수 자질로 말했던 ‘Spiritual Leader’란 무엇일까.

    그가 취임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직원들의 침체된 분위기와 불안한 정서였다. 한 기업의 CEO가 전격 교체된다는 사실이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말 안 해도 누구나 아는 것. 때문에 분위기 쇄신을 위해 ‘UP & UP SAP’ 등 갖가지 캠페인을 벌였다. 또 신바람과 정열을 강조하고 교육했다.

    하지만 국가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위기 상황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캠페인이나 ‘신바람’, ‘정열’이니 하는 구호는 경험상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우롱하는 ‘뻔한’ 것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바로 이런 통념을 깨기에 충분했으며, 그 순간 빛을 발했다.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열정을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인생관대로 2백44명 직원들을 대했고, 동고동락했다. 인생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너무도 쉽게 “엔조이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비즈니스에선 강약이 분명하면서도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선 테크노 전사로 거듭나는, 전형적인 엔터테이너로서의 ‘편안한 사장’이 돼 주었다.

    캠페인이나 각종 구호들이 그저 직원들을 ‘다그치거나 독려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진심을 보여줬다. 리더는 비즈니스를 만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조직과 문화를 만들어주는 지원자라는 평소 신념대로 회사를 운영한 것이다.

    비즈니스는 전투처럼 살벌하고 냉정하다. 후방 지원이 안되는 전투는 패배할 수밖에 없듯 직원들이 비즈니스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돈과 사람, 본사의 기술을 철저하게 지원했다. 조직원이 지치지 않게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 그게 바로 리더의 역할이고 CEO의 역할인 것이다. 이 역할이 선행돼야만 리더가 가진 신념과 리더십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그 결과, 그의 말대로 “어려운 상황에서 직원들이 믿고 따라와 줬으며, 빠른 속도로 스피릿이 전환되고 빌딩 됐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성공이 두 번째 성공으로 이어지고, 성공의 흐름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는 모든 게 “고맙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리더로서 그에 대한 직원들의 이해와 공감은 전문가로서 수십 년 동안 다져놓은 그의 분명한 가치관이 전달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84년부터 98년까지 미국의 IT분야 컨설팅업체에서 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체득한 것은 ‘고객을 이해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

    SAP코리아는 기업을 위한 종합적인 e비즈니스 솔루션을 공급하는 회사다. 솔루션 비즈니스를 한다. 따라서 고객(기업)이 문제를 갖고 있거나 요구사항이 있기 때문에 솔루션을 찾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고객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저 제품을 ‘팔아 넘기는’ 게 아니어야 한다. 고객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법을 함께 고민해주는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솔루션 비즈니스의 영업이며 서비스의 핵심이다.

    특히 본사와 달리 지사는 이 점이 더욱 중요하다. 본사는 완벽한 프로덕트(제품) 생산에 중점을 둬야 하고, 지사는 영업점이기 때문에 본사가 만든 완벽한 상품에 애티튜드(서비스 자세)를 더해야 한다는 것. 이 점을 모든 직원들이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는 데 그가 쌓아온 산 경험과 소신이 큰 힘을 했다.

    그가 회사를 ‘재건’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불어넣은 열정과 신바람은 고객에 대한 태도 변화로 이어졌으며, 결국 ‘아래로부터의 혁신’은 취임 3개월만에 전년도 대비 80%에 가까운 급성장을 이루어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99년 2백69억원이었던 매출은 작년 5백50억원으로 성장했으며, 올해는 다시 1백% 늘어난 1천억원을 목표치로 잡았다.

    그는 “불황이 오히려 우리에겐 기회”라고 말한다. ERP 솔루션을 포함해 SAP가 개발, 판매하는 기업통합 솔루션은 기업 효율성을 위한 경영혁신의 필수 도구이며 e비즈니스를 위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느 때보다 ‘투명성’이 요구되는 요즘의 기업 환경에서 개별 회사의 회계나 재무의 투명성은 물론 산업간, 업종간, 기업간 정보의 흐름을 빠르고 투명하게 공유시켜주는 솔루션이야말로 신경제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경제는 릴레이션십이며, 릴레이션십은 정보에 의해 구축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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