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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골반통·월경통 통과의례로 여겨 … 악화 되면 자궁 떼내고 불임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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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경희대병원 허주엽 교수는 내년 만성골반통연구재단을 설립한다.

“이렇게 아픈데 당사자와 부모는 뭐 했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움을 넘어 기가 막히고 답답하다.”

 지난 3일 오전 만난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허주엽(64) 교수의 얼굴이 무겁다. 그는 최근 강동경희대병원이 만성골반통과 월경통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치료 기회를 주기 위해 받은 사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 지하철 화장실 변기 밑에 누워 있었어요” “골반이 녹는 것처럼 아파서 회사를 그만뒀어요” “월경을 시작한 이후 그날이 되면 배를 싸매고 울어요” “응급실만 안 갔으면 좋겠어요”…. 10대부터 30대 여성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빼곡히 담겨 있다.

 만성골반통은 월경통과 무관하게 골반·아랫배·엉덩이·허리 주변에 극심한 통증이 6개월 이상 지속하는 병이다. 허 교수는 “원인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약 80%가 자궁내막증·자궁선근증 같은 부인과질환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자궁내막증·자궁선근증이 있으면 월경으로 배출돼야 할 자궁 안쪽 조직(내막)이 나팔관을 타고 자궁 주변에 퍼지거나 자궁근육에 파고들어 염증을 일으킨다. 통증과 매스꺼움·구토·두통·우울증 같은 전신증상이 동반된다. 월경통도 진통제로 조절되지 않으면 자궁과 골반의 문제일 수 있다. 자궁기형을 의심하기도 한다.

 허 교수는 많은 여성이 만성골반통과 월경통으로 고통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사람이 잘 바꾸지 못하는 인식 중 하나가 질병에 대한 것”이라며 “잘못된 정보에 매달리거나 여성의 통과의례로 여겨 언젠가는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병을 키운다”고 말했다.

 만성골반통과 월경통은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 허 교수는 “방치하면 증상이 악화돼 자궁과 나팔관을 제거해야 하고 불임의 원인이 된다.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점차 만성골반통 환자가 늘고 발병 연령이 낮아지는 게 문제다. 허 교수는 “학업·직장 스트레스에 서구식 식습관, 성 자유화 문화가 복합된 결과”라며 “선진국처럼 20~30대 젊은 환자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 교수는 만성골반통 등 부인과질환에 따른 고통과 불임을 막으려면 초경 때부터 부모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부모가 월경에 대해 이해하고, 자녀와 대화를 통해 문제가 있으면 병원을 함께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허 교수는 만성골반통 분야의 국내 선구자다. 2005년 만성골반통연구회를 만들고, 2010년 만성골반통학회를 발족해 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현재 학회장을 맡고 있다.

 허 교수는 내년 만성골반통연구재단(가칭)을 세울 계획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허 교수는 “아직 만성골반통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병도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해 병원을 옮겨다니며 만신창이가 되는 환자가 많다”며 “한국이 주도해 근본적인 치료법과 예방법을 밝혀내겠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이어 “여러 진료과를 전전해도 통증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산부인과 정밀초음파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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