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세상을 속일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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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호 02면

잘난 체하더니 딱 걸렸다. 세계 금융계를 주름잡아온 ‘일류 은행’들에 망신살이 뻗쳤다. 영국의 바클레이스은행과 스페인 방키아은행이 제일 먼저 도마에 올랐다. 둘 다 세상을 속였다. 바클레이스는 돈 거래의 기본인 금리를 속이다 들통났다. 방키아는 회계장부까지 조작하며 주주와 고객을 속였다. 이들이 일으킨 파문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스 부도 위기나 스페인의 유로 2012 축구 우승이 저만치 뒤로 밀릴 정도였다.

손병수의 세상탐사

죄질이나 파장 면에서는 바클레이스가 단연 압도적이다. 총자산 기준 세계 7위, 한국에도 팬이 많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스폰서 은행이다. 축구팀 인기만큼이나 잘나가던 이 은행은 지난달 27일 영국 금융감독 당국으로부터 리보(런던 은행 간 금리) 조작 혐의로 거액의 벌금을 맞으면서 추락의 길을 걷고 있다. 당국의 조사 결과 은행 내부 직원들이 서로 짜고 금리를 조작해 영업에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는 씨티은행이나 HSBC 같은 경쟁 은행들로도 확대될 조짐이다. 바클레이스 측은 지난주까지 마커스 에이지어스(66) 회장과 로버트 다이아몬드(61) 최고경영자(CEO)를 잘라내며 사태를 수습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신용등급 강등, 주가 하락 같은 타격에다 이참에 은행을 쪼개버리자는 여론이 거세져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영국이 바클레이스로 들끓고 있던 지난 4일 스페인 사법당국은 로드리고 라토(63) 전 방키아은행 회장의 소환을 발표했다. 스페인 재무장관에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2004~2007년)까지 지낸 거물이다. 우리 저축은행 격인 지방은행 7개를 통폐합해 지난해 1월 출범한 방키아는 1년 반 만에 도산위기에 몰리며 스페인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이 은행은 지난해 7월 기업공개를 통해 30억 유로(약 4조2000억원)를 조달했는데, 정부가 사실상 국유화를 한 뒤 상장 1년도 못돼 주식이 휴지가 됐다. 정부 조사 결과 지난해 3억9000만 유로 흑자로 발표했던 방키아의 경영실적이 사실은 30억 유로 적자로 드러났다. IMF 총재 시절 서울을 방문해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은 구조조정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라토 회장은 회계조작과 업무상 배임 등 여러 혐의로 자칫하면 감옥행까지 각오해야 할 처지다.

두 은행은 내부 정보를 조작하고 활용하며 고객과 시장을 속였다. 은행업은 간단히 말해 돈장사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예금을 받아 마진 붙여서 빌려주거나 투자해서 먹고산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큰 덤을 얻는다. 바로 정보다. 고객의 신상과 재산 상태, 사업내용은 물론 건강이나 취미까지 엄청난 정보가 쌓인다. 반면 고객들은 은행이 제공하는 정보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이처럼 은행이 갖는 일방적인 우위를 전문용어로 ‘정보의 비대칭성’이라 한다. 연세대 박상용(경영학) 교수는 “은행업의 본질은 정보의 비대칭성에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은행은 고객 정보를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쓴다. 고객들도 그렇게 믿고 정보를 준다. 그러나 은행이 정보를 조작하고 자기들끼리 돈벌이에 쓴다면, 은행은 물론 금융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바클레이스나 방키아 파문의 심각성은 이런 신뢰 손실에 있다.

바클레이스의 다이아몬드 전 CEO는 국제금융의 심장부인 런던에서도 잘난 체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BBC방송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문화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것이다.” 그럴듯한 말이다. 그는 그 순간 바클레이스 직원들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을까. 물론 그는 “몰랐다”고 말한다. 리보금리 조작 파문을 파헤쳐 ‘금융의 심장부가 썩었다’고 보도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100여 년 전 미국 금융계의 황제였던 J P 모건 주니어의 말을 인용하며 기사를 이렇게 끝맺었다. “뱅커가 고객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 품격 있게 행동해야 한다.”

두 은행이 일으킨 파문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외환위기와 저축은행 퇴출 사태를 겪으면서 부실 은행, 부실 뱅커들의 폐해를 통감한 우리 입장에서는 과연 금융 선진국들이 이번 파문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면밀히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우리 나름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뱅커가, 은행이 세상을 결코 쉽게 속일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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