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의약분업 원점에서 재검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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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 재정 파탄문제와 관련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엊그제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를 주재하면서 국민에게 사과했다.

우리는 金대통령의 솔직한 '내탓이오' 를 용기있는 사과라고 평가하면서 이번 기회에 의약분업을 원점에서 전면적으로 새롭게 검토하기를 제안한다.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의보재정 안정화 방안의 골자는 의보 지출구조를 합리화하고 보험료를 10~15% 인상하며, 그래도 부족분이 생기면 정부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올해 예상되는 4조원의 의보재정 적자분 가운데 지출구조 합리화로 2조7천억~2조8천억원을 메우고, 보험료 인상을 통해 4천억~5천6백억원의 수입을 늘린다는 것이다.

지출구조 합리화 방안에는 의료기관의 과잉.과다 청구에 대한 심사 강화와 의보공단 구조조정 등이 포함돼 있다. 대신 의약분업의 틀은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안들로는 의보 재정난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보험료 인상이나 국고지원 등 땜질식 처방에 그친다면 재정난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약분업 자체에서부터 시행과정상의 문제점들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그 위에서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7월 의약분업 시행을 전후해 정부 내에는 준비 부족을 지적하는 언론보도 등에 대해 '개혁' 을 반대하는 것처럼 몰아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의약분업이나 의보통합 문제는 국민 건강과 직결된 중대한 국정과제의 하나다.

그럼에도 정부 당국자들은 현장의 목소리나 실상을 무시한 채 탁상행정식 이론을 중심으로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다. 치밀한 현장 실증이나 실험을 거쳐 정책을 시행해도 크고 작은 오류가 나타날 수 있는데 이런 과정이 생략됐으니 그 정책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의약분업 시행의 기본 취지는 의약품 오.남용과 약화(藥禍) 를 막자는 것이다. 그러나 의약분업이 시행된 뒤 항생제 오.남용은 그 이전과 비교해 별로 줄어들지 않았고, 의보 재정은 파탄상태다.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예상되는 의보 재정적자 가운데 3조7천억원이 의약분업으로 인해 추가 지출되는 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해 의료계 파업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행한 의약분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부.여당은 金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선거공약에 연연해 미리 선을 그어놓고 대책을 마련할 게 아니라 백지상태에서 검토해야 한다. 의보 재정난 문제뿐만 아니라 의약분업 전부 또는 일부를 포기한 경우의 비용과 장단점까지 면밀히 따져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울러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대통령에게 "문제가 없다" 고 보고한 사람들이 누군지 밝혀내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은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명분에 얽매여 현실을 왜곡하는 정책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의약분업 사태에서 뼈저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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