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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은폐로 잃은 원전 신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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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군철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 대학교 총장

지난 2월 9일 고리 1호기 정전사고는 어쩌면 영영 모르고 지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절대 비밀은 없었다. 한 달 이상 은폐해 왔던 정전사태는 우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공교롭게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사고 당일 오전 “사고 발생 시 철저한 책임추궁을 하겠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이를 본 당사자들은 인사상 불이익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 이후 원전의 안전성이 국가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이때 사고 은폐를 생각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고장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즉시 체계를 밟아 보고하고 신속히 조치를 취했더라면 국민이 이렇게 허탈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전 보고체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신뢰 붕괴를 자초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안전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인적 오류의 쓰나미’가 고리 원전을 덮친 셈이다.

 사고가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무너져내린 국민 신뢰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를 다시 얻으려면 먼저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과 신뢰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 세계원자력발전사업자협회(WANO)·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전문가 그룹을 활용해 우리나라 모든 원전의 종합 안전점검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원전의 현주소를 정확히 알리고 보완할 부분은 보완해 국민을 안심시키면서 협조를 구해야 한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 쾌거를 이룬 한국 원전 산업은 현재 신고리 3, 4호기와 신울진 1, 2호기를 건설하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도 곧 착공될 것이며 삼척에도 원전이 건설될 예정이다. 이렇듯 원전 건설에 있어 진행형인 우리나라는 건설과 운영 능력의 우수성은 인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시스템은 제대로 갖추고 있지만 꼭 필요한 장인정신이 결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인정신은 뛰어난 기술과 함께 반드시 자존심이 담겨야 한다. 처벌이 무서워 속이고 은폐한다면 이미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며 장인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대형 사고들을 살펴보면 천재(天災)보다는 인재(人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자력 안전을 이야기할 때 ‘1대29대300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하인리히 법칙’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즉 심각한 안전사고가 1건 일어나기 전에 29건의 경미한 사고가 있었고 29건의 경미한 사고가 일어나기 전 300건이나 되는 위험요소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후들을 미리 파악해 대비책을 철저히 세우면 대형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안전문화만큼은 철저해야 하며 또한 절대적이어야 한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정부는 설비 점검을 중심으로 스트레스까지 점검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더해 기술자 및 안전문화에 대한 스트레스 점검도 깊이 있게 진행해 그동안 누적돼 있던 피로도를 낮추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관계기관에서는 조직문화의 개선, 즉 상명하복의 계선 조직이 아닌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가질 수 있도록 병렬 참모 조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처벌제도도 재정비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까 봐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더불어 고장 및 안전 부문에서 인간에 의존하지 않는 자동 경보·보고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

 그래도 원전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주 에너지원이다. 손가락 하나가 아프다고 건강한 손을 잘라낼 수는 없으며, 빈대 한 마리 없애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다. ‘가장 강력하면서도 깨끗한 에너지 원자력’은 안전을 완벽히 담보할 때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박군철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 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