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연인끼리… '피아노 듀오'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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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보로딘과 리아도프·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다섯 명의 작곡가들이 한 파티에 초대받았다.

이들은 집주인의 귀여운 딸에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젓가락 행진곡" 이라고 대답했다. 손가락 두 개만 있으면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이기 때문이었다.

모임에 참석한 작곡가들은 의기투합해 '젓가락' 을 주제로 변주곡·행진곡·왈츠·변주곡·자장가·폴카 등을 작곡했다. 이 소녀와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꾸민 피아노 듀오곡이었다.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세계 피아노 듀오 대전집' 이 일송출판사(www.ilsongmusic.co.kr.02-837-0114)에서 출시됐다. 43명의 작곡가가 쓴 1백곡의 악보를 출간하면서 함께 25시간 소요되는 이 음악을 CD 25장에 담았다.

카티아·마리엘 라베크 자매(www.labeque.com)를 비롯해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크리스토프 에센바흐·자크 페브리에·미셀 베로프 등 정상급 피아니스트들의 녹음을 한데 엮었다.

피아노 듀오는 19세기 아마추어 연주자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였다. 스승과 제자, 혹은 어머니와 딸, 연인이 건반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정겹다

두 명의 연주자가 피아노 한 대를 연주하는 '연탄곡(連彈曲)' 이 아마추어용이라면 마주 보고 각각 한 대를 연주하는 '투 피아노'는 전문 연주자용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소나타 F장조 K.497' , 라흐마니노프의 '이탈리안 폴카' 등 처음부터 피아노 듀오를 위해 작곡된 소품도 있지만, 홀스트의 '혹성' 이나 하차투리안의 '칼의 춤', 라벨의 '라 발스' 처럼 관현악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작품도 많다.

관현악 뿐만 아니다. 리스트의 '돈조반니의 회상' 처럼 두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오페라 하이라이트도 있다. 반대로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처럼 피아노 듀오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19세기에는 관현악 연주를 접할 기회도 드물었고 라디오와 음반이 발명되기 전이라 가정에서 교향곡·왈츠·오페라를 듣기 위해선 피아노 듀오 편곡을 2명이 직접 연주하는 방법을 택했다. 관현악의 방대한 악상을 두 사람이 분담한 셈이다.

두 명이 나란히 앉아 한 대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체 접촉' 때문에 특히 남녀 간에 인기였다. 모차르트는 일부러 남자의 오른손과 여자의 왼손이 X자로 겹치도록 작곡하기도 했다.

악보출판업은 공개 연주회·피아노 산업의 발달과 맞물려 19세기 유럽의 음악시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베토벤·체르니·슈베르트·리스트 등 많은 작곡가들에게 피아노 듀오 편곡은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아마추어나 전문가 할 것 없이 모두 피아노 듀오 연주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음악학교에서는 듀오 연주가 피아니스트를 위한 필수과목으로 포함됐다. 특히 오페라 편곡은 피아니스트에게 '노래하는 법' 를 가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널리 연주됐다.

정상급 독주자로 활동하지 않으면 반주자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는 피아니스트들에게 피아노 듀오는 비좁은 무대로 진출하는 새로운 통로다. 자칫 개인주의에 빠지기 쉬운 피아니스트들이 앙상블 기량을 쌓으면서 '음악적 대화'를 즐기는 게 최근의 추세다.

국내에서도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이 한국피아노듀오협회(회장 이방숙)를 비롯해 지방에 결성된 피아노 듀오협회에 가입해 활동 중이다. 오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모차르트·브루흐·멘델스존·풀랑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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