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루스를 깨다' 로저 매리스

중앙일보

입력

로저 매리스는 베이브의 그늘 속에서 야구인생을 살면서 1961년에 61개의 홈런을 기록하였지만, 그 기록은 팬들 사이에 있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매리스가 루스의 기록을 깨기 바라는 팬들은 거의 없었다.

매리스가 자신의 61번째 홈런을 기록했을 때, 그것을 보기 위해 양키 스타디움에 있었던 팬은 고작 23,154명에 불과했다.

메이저리그는 1961년부터 이전과는 다른 경기수를 치뤘다. 워싱턴 세네터스와 로스엔젤레스 에인절스가 새로 참가하면서 경기수가 154경기에서 162경기로 늘어났다.

당시 커미셔너는 포드 프릭이었다. 그는 베이브 루스를 옹호한 유령 작가이기도 하였다. 매리스와 미키 맨틀 모두 루스의 기록에 접근해 가자, 프릭은 어떤 선수라도 루스의 기록을 공식적으로 깨기 위해서는 154경기에서 61홈런을 쳐야 한다고 분명한 방침을 정했다. 루스는 1927년 154경기만을 치루며 60홈런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리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는 루스의 유령을 넘어서야 할 뿐만 아니라 154경기에서 그것을 이루어야만 했다. 매리스는 154경기만에 58개의 홈런을 달성했다. 그 때 그는 "프릭 커미셔너에 관한 한 기록을 깨기까지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8경기를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리스는 154경기만에 기록을 깨고 싶었다. 154번째 경기는 루스의 고향인 볼티모어에서 진행되었다. 불과 21,023명의 팬들만이 그 경기를 보기 위해 볼티모어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모였고, 맨틀은 이미 엉덩이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두번째 타석에서 매리스는 밀트 패퍼스로부터 홈런을 뽑아냈다. 그것은 매리스의 59번째 홈런이었다.

그러나 매리스는 그 날 마지막 타석에서 아웃을 당하면서 더 이상의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다. 당시 스포츠기자들의 시각들을 밀워키 저널의 기자였던 올리버 쿠에츨은 잘 묘사하고 있다.

"매리스가 154경기 동안 60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지 못한 것은 이곳에서 더 이상의 후회를 낳지 않는다. 만일 그 기록이 깨어질 운명이라면, 더 위대한 야구재능을 가진, 그리고 더 위대한 색깔과 대중의 매력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한다. 매리스는 색깔이 없다. 그는 좋은 빅리그 선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그라운드에서 평범한 선수이며, 붙임성 없는 선수일 뿐이다. 그 선수에 대해서는 깊은 영웅적인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매리스는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155번째 경기를 출장하지 않았고, 158번째 경기에서 60번째 홈런을 쳤다. 그리고 매리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전까지 60홈런에서 멈춰 있었다.

1961시즌 동안 매리스와 맨틀은 아파트를 같이 쓰면서 실제로 함께 살았다. 몇몇 뉴욕 스포츠기자들은 오랜 양키스 스타들인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사이의 반목을 조장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매리스와 맨틀이 실제로 친구사이였을 때 질투심에 의해 갈라졌다는 것을 암시하곤 했다.

"1961년에 있어 부수적인 면 중의 하나는 팬들이 미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다."양키스의 유격수였던 토니 쿠벡은 이렇게 회상했다.

"미키는 시즌 전에 때때로 야유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몇몇 팬들은 그가 중견수 자리에서 조 디마지오를 대체했다는 사실을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리스보다) 미키가 그 기록을 깨기 원했기 때문에 미키에게만은 큰 갈채를 보냈다."

또한 매리스는 양키스로 이적하기 전에 클리블랜드와 캔자스시티의 팜 시스템에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양키선수가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쿠벡은 대부분의 양키 선수들은 그들이 비록 매리스에 대해 엄청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맨틀이 그 기록을 깨기를 더 선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맨틀이 부상당한 이후 팀 전체는 매리스를 언론으로부터 벗어나고 압박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매리스 주위로 모여들었다.

화이티 포드가 1961년에 그 마지막 경기를 위해 구장에 나타났을 때, 그는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기자들과 포드 프릭은 모든 것이 가짜인 것처럼 어떤 요행수를 운좋게 발견할 수 있기를 노력하였다. 비록 로저가 그 기록을 깬다하더라도 그는 그가 받아야 할 가치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경기에서 양키 스타디움은 절반 정도만이 찼지만, 우측 외야석만은 가득 찼다. 5000달러의 상금이 61번째 홈런공을 잡는 팬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던 것이다.

첫 타석에서 매리스는 좌익수 쪽의 평범한 타구를 날렸다. 그러나 3번째 이닝에서 보스턴의 트레이시 스텔러드는 무릎쪽의 빠른 볼을 던졌고, 매리스는 그것을 우측 외야석을 넘어가는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그는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그의 머리를 아래로 숙인채 베이스를 터벅터벅 돌기 시작했다. 뜨거운 환영도, 그 어떤 축하도 없었다.

그리고 그 홈런 이후 매리스의 야구 인생은 결코 똑같지 않았다.그와 언론과의 문제는 점점 커졌고, 홈런수는 61개에서 이듬해 33개로 뚝 떨어졌다. 33개의 홈런은 매리스가 1962년 이후에 친 가장 많은 홈런이었고, 손목 부상은 그의 힘을 약화시켰다. 매리스는 1968년까지 12년의 빅리그 기간동안 275개의 홈런을 기록한 이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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