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지 않는 집, 대출 받아 생계비로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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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에 살고 있는 자영업자 신모(62)씨는 빚 걱정에 요즘 밤잠을 설친다. 신씨는 지난해 말 작은딸의 결혼자금이 모자라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5000만원을 또 빌렸다. 이미 1억50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최근에는 사업까지 어려워지면서 임시 생활비 마련을 위해 다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야 할 판이다. 신씨는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안 해주니 결국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며 “이자 물기가 버거워 집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보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하소연했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는데도 주택담보대출은 되레 늘고 있다.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은퇴자가 늘면서 집을 담보로 ‘생계형 대출’을 끌어다 쓰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18일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올 1분기 전국 아파트 거래량은 총 10만511건으로 2010년 4분기(15만8092건)의 3분의 2로 쪼그라들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보통 새 집을 사거나 더 큰 집을 장만할 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린다”며 “주택담보대출의 증감은 부동산 경기와 관계가 깊다”고 말했다. 그는 “대개 주택 경기가 좋을 때 주택담보대출도 늘어난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주택 시장과 상관없이 집을 담보로 빚을 얻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예금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306조9764억원으로 2010년 4분기(284조5253억원)보다 8%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신용대출 등 비(非)주택담보 대출이 줄어든 것과는 대비된다. 이에 따라 전체 가계대출 잔액에서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67.7%로 관련 통계가 만들어진 2003년 4분기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금융연구원 김우진 연구위원은 “수입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오르고 쓸 돈은 많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금리가 싸고 대출이 쉬운 담보대출로 몰리고 있다”며 “최근에는 은퇴한 ‘베이비 부머’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사업자금으로 쓰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트렌드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상반기까지 42.1%에 머물던 ‘주택 구입 이외’ 목적의 주택담보대출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48.4%까지 치솟았다. <관계기사 e9면>

 집이 없는 사람들의 ‘생계형 대출’도 급증하고 있다. 국민연금으로 생활하던 오모(68)씨는 최근 건강이 악화돼 병원 신세를 졌다. 300만원에 달하는 병원비를 구할 길이 막막해 대부업체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결국 오씨는 국민연금공단이 지난달부터 시행한 ‘국민연금 실버론’을 신청해 저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공단 관계자는 “연금을 담보로 노년층에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는 ‘실버론’이 시행 한 달 반 만에 200억원을 넘었다”며 “당초 예상했던 신청 인원 6000명이 한 달 반 만에 거의 다 찬 것”이라고 전했다.

 전세자금·보험금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사례도 늘고 있다. 5월 말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전세금 담보대출 잔액은 1조9332억원으로 2010년 말의 세 배로 늘었다. 보험금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보험약관대출도 1년 만에 잔액이 3조원 이상 늘었다.

 중앙대 경영학부 박창균 교수는 “생계형 대출의 급증은 빚을 내 생활비를 충당할 정도로 채무자의 상환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라며 “‘부채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에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부동산 담보대출의 경우 집값 하락으로 집을 팔지 못하고, 늘어나는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다시 대출을 받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홍익대 경제학과 전성인 교수는 “집값 하락세가 장기간 이어져 담보가치가 급락한다면 정상적이었던 주택담보대출 부문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고령화로 인해 부동산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은행의 부실까지 불거지면 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손해용·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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