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서민 지원 내세운 ‘팔 비틀기’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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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고란
경제부문 기자

최근 주요 증권사는 금융투자협회로부터 문서 하나를 받았다. 제목은 ‘금융회사 법인카드 포인트 적립 현황 자료 제출 협조 요청’.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지난달 말 “전 금융권의 법인카드 포인트를 기부해 저소득 금융 피해자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현재 금융권의 법인카드 포인트 발생액은 연 40억~50억원이다. 이걸 보이스피싱, 대출 사기, 불법사금융, 저축은행 후순위채 등의 피해를 본 저소득층에 지원하자는 취지다. 정부의 세수 확보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금융회사가 나서 줬으면 하는 게 금감원의 입장이다.

 하지만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강요나 다름없다. 문서의 맨 마지막 장에는 ‘지원기금 참여 여부’를 표시하는 항목이 있었다. 한 증권사 대표는 “Y(예)나 N(아니요)으로 표시하라고 하지만 어느 회사가 감히 ‘N’이라고 쓰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금융 당국이라고 개별 회사의 재산을 마음대로 기부하라고 강요할 수 있느냐”며 “사실상 팔 비틀기”라고 하소연했다.

 금융 당국의 팔 비틀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불법사금융 단속으로 저신용자의 대출이 어려워지자 금융 당국은 연일 은행권의 책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은행이 지원하는 ‘새희망홀씨’의 취급 실적을 수시로 공개하며 저신용자 대출을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저신용자가 주로 찾기 때문에 만기가 몰릴 경우 연체율이 급증할 수 있다”며 “생색은 정부가 내고 부담은 은행이 짊어지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최근 한 조사에서 한 금융회사의 지난해 남자 직원 평균 연봉이 1억44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돈을 벌면서 서민을 위해 지원하는 게 뭐 그리 아까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대도 이런 식의 ‘팔 비틀기’는 아니다. 물론 당국이 힘을 쓰면 ‘반짝’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속가능성이다. 1~2년 뒤면 원위치로 돌아가거나 부작용만 양산하는 정책은 펴지 않음만 못하다. 금융 관련 피해를 막기 위해선 사기 대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불법사금융 단속을 철저히 하는 등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물론 금융회사도 자발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늘려야 한다. 그래야 고객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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