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민초들의 삶 그린 〈한국생활사박물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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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 영화계 최대 화제는 '공동경비구역(JSA)'이었다. 참신한 기획과 과감한 투자가 어우러져 탄생한 그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쉬리'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면서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의 제작 방향에 어떤 암시를 줬다. 그렇다면 '한국생활사박물관'시리즈야말로 출판계에서 쏘아올린 회심의 'JSA'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7월에 첫선을 보인 1권 〈선사 생활관〉과 2권 〈고조선 생활관〉은 출판사측이 만든 '사고'였다. 시장 전망이 애매한 상태에서 2002년까지 총 15권의 초대형 기획물로 만들어 보겠다는 용기가 그렇고,15억원이란 예산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사계절 출판사의 배짱이 놀라왔다.

눈 밝은 이들에게 지난해 최고의 단행본 중의 하나로 꼽힌 거야 당연하지만, 7개월만에 선뵌 3권 〈고구려 생활관〉은 역시 주목거리다. 핵심은 이렇다.'상상력의 부재 때문에 지루한 기존 역사서를 뒤바꿀 확실한 대안'.

◇ 벽화로부터 걸어나온 대중 역사물

만주벌판을 평정한 광개토대왕,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그들을 쫓아 활 쏘며 말 달리던 무사들….우리 머리 속에 각인돼있는 고구려인의 이미지는 대개 이렇다.

'땡땡이'옷을 즐겨입고 간장에 절인 멧돼지 고기를 먹었으며 온돌방에서 입식 생활을 하던 고구려인을 떠올리는 이는 얼마나 될까.무용총 벽화는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고구려 시대 작품이란 건 알면서도 물방울 무늬의 긴 옷소매를 늘어뜨린 채 사위춤 한판을 벌이고 있는 그 춤꾼들 역시 고구려인이라는 사실,광개토대왕과 동시대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우리 역사 교육의 결과다.

신간 〈고구려 생활관〉에서 받는 역사 강의는 다르다.7백년 간 1백43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만주땅을 호령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영글었던 고구려 시대 민초들의 삶을 세심한 고증을 통해 1천5백여년 전 벽화 속에서 끄집어내 2001년 현재에 되살려 놓았다.

농부 용대,대장장이 을로, 과부 무덕 등 가상의 갑남을녀들을 동원한 이야기식 서술이 맛깔스러울 뿐더러 수백개의 유물 ·유적 사진과 삽화들은 이 책을 전국적 규모의 데이터 베이스를 갖춘 사설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한다.

또 특별전시실에 재현된 고분 속 별자리의 의미라던지 특강실에서 듣는 주몽 신화 ·광개토대왕릉비에 관련된 논쟁 등은 이 책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유용함을 보여준다. 고구려 역사에 관한 한 우리보다 한발 앞선 북한측 연구와 자료들이 더 많이 반영되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출판계의 JSA'

오는 3월엔 백제,6월엔 신라 생활관이 문을 연다.아직도 텍스트와 시각 자료 설명 간의 중복성이라든지 만화적인 느낌이 남아있는 일러스트레이션 등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시리즈를 계속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밝혔듯이 국내 출판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1년8개월의 기획기간을 거쳐 역사학자 ·건축가 ·무용가 등 전문가 수백명과 권당 1억∼1억5천만원의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돼 태어난 '한국생활사박물관'은 영국 DK사의 '비주얼 박물관' 등 세계 유수 출판사들이 만든 문화유산 관련 서적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특히 21세기 역사 및 역사 교육의 화두인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출판사측은 수출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영어 등으로 번역해놓을 경우 최소한 도서관 비치용으로 수천권 이상의 기본 수요는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또 이 기획물은 '다큐멘터리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국내 출판계엔 생소한 분야를 개척하는 등 디지털 시대에 맞춰 '보고 느끼는 책'을 만들려는 편집진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 '출판계의 JSA'가 '제2,제3의 생활사박물관' 탄생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출판계 침체를 외부 요인 탓으로만 돌리며 작은 실패조차 두려워해온 우리 출판계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그러나 'JSA 신화'의 절반은 관객들의 호응이 만들었다는 것도 염두에 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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