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축구판이 정치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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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부리람과의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광저우가 2-1로 이긴 뒤 이장수 감독(앞)을 주장 정쯔가 끌어안고 있다. 이장수 감독은 이 경기 직후 경질됐다. [부리람(태국) 신화통신=연합뉴스]

“축구를 축구 그 자체로 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장수(56) 감독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단호했다. “최근 중국 프로축구는 양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지만 질적인 면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언급한 그는 “축구를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감독은 최근 소속팀 광저우 헝다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15일 열린 부리람 유나이티드(태국)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최종전 직후 구단 측으로부터 경질 통보를 받았다. 의외였다. 이 감독의 지휘 아래 광저우는 올 시즌 수퍼리그에서 7승1무2패로 선두(10라운드 기준)를 질주 중이었다. 지난 시즌 중국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올해 첫 출전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중국 클럽이 아시아 클럽대항전 본선에서 조 1위로 16강에 오른 건 광저우가 최초다. 감독과 구단 간 갈등도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구단이 사령탑을 전격 교체한 데 대해 이 감독은 ‘외부적 요인’을 언급했다. 그는 “근래 들어 ‘성적’이나 ‘선진화’ 등 일반적인 목표보다 ‘주목할 만한 이슈 생산’을 먼저 신경 쓰는 중국 클럽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광저우 구단 또한 ‘세계적인 명장 영입’을 올 시즌의 이슈로 정하고 나를 경질했다. 이번에 정식 통보를 받긴 했지만, 실은 2~3개월 전부터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광저우가 이 감독의 후임으로 정한 인물은 2006 독일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의 우승을 이끈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다. 이 감독에 따르면 리피 감독은 올 시즌 초부터 광저우 경기에 꾸준히 측근을 파견하는 등 일찌감치 부임 이후를 준비해 왔다. 이에 발맞춰 중국 언론은 ‘네임밸류가 부족한 한국인 지도자에게 중국 최고 축구팀을 맡기는 게 말이 되느냐’며 노골적으로 ‘이장수 흔들기’를 했다.

 축구 클럽이 ‘이슈’를 제공하는 쪽은 중국 정치계다. 헝다 그룹의 총수 쉬자인 회장은 축구를 잘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럼에도 2년 전 축구단을 인수한 이후 매년 600억원을 쏟아 붓고 있다.

 중국 스포츠지 티탄저우보의 마더신 기자는 “올가을 중국 정치의 1인자로 부상할 시진핑 부주석은 소문난 축구광이다. 정치적 판세를 미리 읽은 헝다 그룹이 시 부주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축구팀을 창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광저우 부리, 상하이 선화 등 최근 들어 투자를 급격히 늘린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애당초 축구단의 창단 목적 자체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마 기자는 “불합리한 일 처리와 검은 거래가 과거 중국 프로축구의 문제였다면, 최근에는 경기력의 향상보다는 빅스타 영입, 천문학적 씀씀이 등 표면적인 부분에 치우친 게 문제”라면서 “올바른 목표 설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장수 감독과 같은 희생양이 또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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