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합병 '소극적 자세' 못 벗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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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에선 은행 합병을 '남의 장점으로 나의 약점을 보완한다' 는 공격적 성장전략으로 생각하지만 국내에선 '죽기 전 마지막 극약처방' 으로 본다." 금융연구원 지동현 선임연구위원의 말이다.

세계의 유력은행들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합병 파트너를 찾고 있는 반면 국내에선 합병 반대 파업으로 은행업무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란 얘기다.

전문가들은 금융산업에서 합병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대세라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대형화하지 않고는 정보통신부문의 투자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티은행의 정보통신부문 투자는 1998년 20억달러에 달했다. 일본 도시(시중)은행도 평균 5억달러. 반면 국내 시중은행의 투자액수는 지난해 은행당 평균 5천만달러에 불과했다.

금융감독원 자문관 최범수 박사는 "갈수록 늘고 있는 글로벌 금융서비스와 인터넷뱅킹 수요를 따라가자면 앞으로 수년간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현재 국내 은행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고 말했다.

어정쩡한 합병은 안하니만 못하다는 지적도 많다. 국민.주택은행의 경우도 업무가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합병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인원과 점포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삼성경제연구소 최희갑 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 이인실 박사는 "일반적으로 직원 한 명의 유지 비용은 통상 연봉의 두 배로 봐야 한다" 며 "인원을 과감히 줄이려면 일시적인 비용부담이 되더라도 파격적인 명퇴금을 줄 필요도 있다" 고 설명했다.

기왕 합병을 한다면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문도 많다.
국민.주택은행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이름만은 양보할 수 없다" 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케미컬은행은 체이스맨해튼은행을 인수하면서 체이스 이름을 썼다. 체이스의 인지도가 더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

현대증권 백종일 애널리스트는 "누가 더 자리를 많이 차지하느냐는 식의 발상에 빠져들다 보면 아무 것도 안된다" 며 "'니편 내편을 따질 게 아니라'어떻게 하면 은행의 기업가치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느냐의 관점에서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 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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