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한없이 아름다운 '오팔팔 밥돌이'의 삶

중앙일보

입력

"겨울 밤, 성에로 변한 허연 입김이 이불깃을 버석거리게 할 만큼 방이 추웠다.
생각 끝에 방안의 한서(漢書) 한 질을 이불 위에 죽 덮었다.

며칠 전에도 바람에 등불이 흔들려 '논어(論語) ' 한 권으로 구멍을 막았었다.

하긴 두보도 길 한 가운데서 말 안장을 덮고 억지 잠을 청했다더니…" 극도의 궁핍을 견디며 글을 읽던 전시대 사대부의 산문이 남긴 울림이 간혹 되새김질됩니다.

세밑의 추위 때문에 더 그럴 터인데, 아취 넘치는 제목을 단 책 '한서(漢書) 이불과 논어(論語) 병풍' (열림원) 이 그것입니다.

'탁월한 국역(國譯) 의 한 모델' 일 게 분명한 한양대 정민 교수의 이 번역본을 제 방의 좋은 자리에 꽂아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지기(知己) 이기도 한 이덕무(1741~1793) 를 두고 옛 사람들은 '책벌레 바보(看書痴) ' 라며 손가락질했다는데, 외려 이덕무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의 일을 비춰보건대, 득의의 글을 읽고 기쁨을 주체못해 미친 듯 소리치고, 손뼉치며 평하는 글을 휘둘렀으니, 이 또한 우주 간의 유희 아닌가."

그 보상(補償) 없는 깨끗한 유희에 감히 비할 순 없겠지만, 기자도 행복한 위인임에 분명합니다.

1년 내내 쏟아지는 신간을 훑으며 때론 '기쁨을 주체 못했으니' 말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지금 누가 그런 책 몇 권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최일도 목사의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울림) 를 내세울 작정입니다.

왜 이 책이 매력이 있을까 스스로 궁금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책 읽는 이에게 직핍(直逼) 하는 어떤 힘 때문입니다.

먹물들의 괜한 현학 취미 내지 위선 같은 것이 깨끗이 씻겨나간, 그래서 서민들의 삶을 그들 눈높이에서 보듬고 살아온 저자의 10여년 나눔의 삶이 다시 읽어도 괄목할 만 합니다.

청량리 사창가의 '언니' 들이 '밥돌이' 라고 부르는 최일도 다일교회 담임 목사의 이 글은 만담(漫談) 이 따로 없을 정도로 구수합니다.

"저는 길거리에서 누가 '목사님' 하고 부르면 그냥 지나갑니다.

요새 목사들이 워낙 많아서요(웃음) . 동네 언니들이 '밥돌이 아저씨' 라고 부르면 꼭 뒤돌아봅니다.

애정이 가니까요. 왜 미국 대선에서 떨어졌던 사람도 밥돌 아닙니까. 제가 전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손잡고 밥짓는 삶을 살지 않겠느냐 하고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만, 부치진 않았습니다(웃음) . " (41쪽)

사실 책에 간혹 등장하는 육두문자들도 삶의 싱싱함을 전달하는 힘으로 느껴집니다.

밥돌이 목사의 일을 항용 빈민 선교라고 부르지만, 저자는 자신의 밥상 공동체 운동이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는 것, 외려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살겠다는 영성(靈性) 운동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물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봅니다.
"낮은 자리에서 함께 나누는 그 밥상 공동체는 하나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시인 박노해) "다시 태어난다면, 밥짓는 시인처럼 일하고 싶다" (강원룡 크리스챤 아카데미원장) .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를 읽다보면 최목사의 깨달음이 책상물림의 허언(虛言) 같은 것이 아님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변비로 항문이 막힌 노인을 위해 숟가락을 들고 돌처럼 딱딱해진 똥을 파내는 다일공동체의 기막힌 일상이 그려지고, 밥 먹여준 사람들로부터 되레 욕을 얻어먹는 기막힌 삶 속에서도 신념처럼 얻어진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최목사가 바라보기 힘든 성자냐면 외려 인간적입니다.

"저는 노숙자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다 내 부모님 같다가도, 까딱하면 바지에 똥 오줌 갈겨대는 사람, 알콜 중독자, 가래침 뱉어대는 행려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이가 짐승인??내가 사람 섬기고자 여기 왔지 짐승 섬기자고 왔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 (156쪽)

이런 번민 끝에 얻어지는 다음의 성찰을 독자분들과 함께 음미해보고 싶었습니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못난 제 모습이 되비치는 대목은 이와 같습니다.

"참사랑의 나눔은 빵도 함께 나눠야 하는 것이지만, 가난하고 병든 그들을 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형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기 전까지는 아무리 나눠줘야 우리는 거지 나자로에게 부스러기 빵이나 던지는 타락한 부잣집 사람들입니다.
왜 부자는 벌을 받았을 것 같습니까?" (147쪽)

예전 베스트셀러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이후 삶의 기록을 다시 펴낸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를 기자는 점점 더 외형이 번듯해지는 기독교의 자기갱신에도 유효한 텍스트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 세밑에 음미해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최목사가 던진 이 구절입니다.

즉 자신에게 '상처' 를 준 이들은 윤락여성이나 깡패들이 아니었다는 점, 외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나 봉사현장에 온 독선적 신앙인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상처' 를 받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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