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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3대세습 비판 직후 고모 김경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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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11년 1월 13일 오후 3시 고미 위원은 마카오 항구 근처의 호텔 카페에서 김정남을 만났다. 직접 만나 인터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커피를 시켰는데 중국인 직원과는 안면이 있어 보였다고 했다. 김정남은 “(사진을) 잘 찍어 주세요. 잘 찍어 주신다면야 제가 감사드리죠”라며 웃었다. [사진 고미 요지]

때로는 전혀 의외의 우정도 있다. 어울리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서로 좋아하는….

북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41)과 일본 도쿄신문 기자 고미 요지(五味洋治·54)가 그런 관계다. 두 남자는 너무 다르다. 띠 동갑이 넘는 나이 차는 그렇다 쳐도 김정남이 감정 표현에 스스럼없는 외향적 캐릭터라면 고미씨는 내성적인 성격에 가깝다. 외모도 김정남은 키 1m75㎝ 정도에 살집이 꽤 두둑한데 고미씨는 1m85㎝의 큰 키에 조금 마른 듯한 체격이다. 무엇보다 북한과 일본은 서로 ‘적대국’이다. 기본적으로 감정의 거리가 가까울 수 없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2004년 중국 베이징 국제공항에서다. 우연히 그를 알아보고 다른 기자들과 달려가 명함을 준 게 전부였다. ‘그냥 스쳤다’고 해야 정확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관계는 7년 넘게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마음이 가는’ 사이가 됐다. 김정남은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모씨에게 “사실은 고미씨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주변에서 다 반대해도) 만났다”고 털어놨다. 이심전심일까. 고미씨도 기자에게 “(김정남이) 사회에서 만난 친구 중 가장 나를 생각해줬던 친구”라며 인터뷰 내내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도쿄 시내 곳곳마다 벚꽃이 흐드러졌던 4월의 한낮. 도쿄신문 본사에서 ‘그와 그의 사정’을 들어봤다.

도쿄=이소아 기자

못내 미안한 한 가지

일본 도쿄신문 본사 맞은편 공원에서 포즈를 취한 고미 요지 위원. 벚꽃이 만개해 직장인들이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으며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고미 위원은 “도쿄 사람들도 방사능 오염을 걱정해 수돗물이 아닌 생수를 사 먹는다. 한국의 ‘삼다수’ 인기가 좋다”고 했다. [사진=이소아 기자]

고미씨는 지난 3월 1일자로 신문사의 외교·안보 편집위원이 됐다.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기사나 칼럼을 쓰는 선임기자다.

 올해로 기자경력 30년. 꽤 ‘짬밥’이 높지만 편집국장이나 논설위원 대신 ‘그냥 기자’를 택했다. 여기에는 김정남과의 인연이 큰 역할을 했다. 일종의 ‘전공’이 정해졌달까, 어쨌든 남은 세월 기자의 신분으로 북한과 한반도 문제를 맡아야 할 것 같았다.

 김정남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책을 냈기 때문이다. 고미 위원은 올 1월 일본에서 『아버지 김정일과 나 김정남 독점고백(父.金正日と私 金正男獨占告白)』이라는 책을 냈다. 7년 넘게 김정남과 주고받은 메일 150통과 직접 만나 인터뷰한 7시간의 이야기를 엮은 내용이다. 일본에선 현재 20만 부 넘게 팔렸으니 이 책 덕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셈이다. 한국에서도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책 출간에 대해 의논하지 않으신 겁니까.

 “원래 기사든 책이든 다 써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부친상 중에 새로운 내용을 공개하는 건 저에게 매우 불리하다’고 메일이 왔어요. ‘북한 정권이 매우 위험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요. 3년상 이후에 책으로 펴내면 좋겠다고 했죠.”

●그러면 합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군요.

 “그렇죠…. 무시해 버린 모양이 됐습니다. 사실 (책 출간은) 더 기다릴 수도 있었어요. 저도 김정남씨와는 일과 관계없이 평범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역시 기자 윤리란 게 있었습니다. 그와의 대화를 ‘역사’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고, 북한에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한 이 시점에서 어쩌면 더 나은 북한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김정남씨의 말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고미 요지가 펴낸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지금도 e-메일을 주고받으시는지요.

 “지금은 끊어졌어요. 지난 2월에 온 게 마지막이에요. 한국어판이 나온다고 알렸고 그 뒤로도 3~4번 보냈는데 답이 없어요.”

●그럼 이제 관계가 끝난 건가요.

 “조심스럽지만 저는 (다시 이어질 거란) 희망이 있습니다. 김정남씨는 ‘핫메일(hotmail.com)’ 계정을 쓰는데 메일은 제대로 간 것 같아요. 과거에도 그는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메일을 중단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먼저 연락을 줬죠. 기자로서 밝혀야 한다는 마음과, 거의 친구가 됐는데…, 친구로서 지켜주고 싶었던 것들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어요. 여전히 너무 미안합니다. 그 부분이라도 사과할 수 있게 답장이 왔으면 좋겠어요.”

고미 위원은 한국말을 잘한다. 1997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배우고 99~2002년 서울지국에서 근무하며 익힌 솜씨다. 말이 좀 느리고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릴 때도 있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김정남과도 모두 한국어로 대화하고 한글로 e-메일을 주고받았다.

●김정남은 북한 억양을 씁니까.

 “아뇨. 거의 서울 말씨에 가까워요. 말도 존댓말로 아주 공손하게 하고요. 스위스 제네바에서 9년이나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고, 본인이 고친 것 같아요. 국제 감각이 있어서 그런지 (북한 억양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특종이냐 VS 친구냐

 고미 위원은 2004년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김정남과 마주친 이후 그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다. 일본 기자 가운데 거의 유일했다. 앞으로 그가 북한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어떤 의견을 피력할지 등. 김정남을 찾아 나선 것도 여러 번이다. 베이징 북한 대사관이나 주변 북한 식당을 무작정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다. 그 사이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북한 후계자 이슈가 한창일 때 김정남 암살 미수사건(2004)이 났고 중국 망명설(2009)도 보도됐다. 특히 2010년엔 한국의 중앙SUNDAY가 마카오에서 김정남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다. 고미 위원은 그 기사를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고 했다. “마치 수소문하던 친구를 찾은 것 같았거든요. 처음 딱 드는 생각이 ‘무사히 잘 지내는 거 같아서 참 다행이다’였어요. 참 희한하죠. 지금 생각해도…(웃음).” 그러다 같은 해 10월 22일 드디어 김정남이 처음으로 e-메일을 보내왔고 그때부터 만남과 서신 교환이 이어졌다.

●왜 e-메일을 보낸 것일까요.

 “제가 2007년에 ‘문예춘추’에 김정남씨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 ‘다시 한번 만나서 의견을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썼거든요. 그걸 김정남씨가 평양에서 본 겁니다. 그 마지막 말이 잊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당시 이슈가 됐던 북한 후계자 문제도 연관이 있었겠죠. 마침 동생 김정은이 정식 후계자로 지명됐으니까요.”

 고미 위원은 2011년 1월 13일 마카오에서 김정남을 만나 인터뷰했다. 김정남은 그 자리에서 북한의 개방·개혁을 주장하며, 3대 세습과 군 권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이와 관련한 김정남의 발언들은 대부분 책과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그리고 고미 위원과 헤어지며 “앞으로는 기사를 위해서든 개인적으로 만나 식사를 하든 계속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끈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마카오에서 한 얘기는 기사화하기로 됐던 건가요.

 “네. 자기가 한 말은 기본적으로 다 기사화해도 된다고 했죠. 그래서 오히려 놀랐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에서 강한 경고를 받았다니까 미안했죠.”

●경고는 어떤 루트로 받는 걸까요.

 “음… e-메일보다는 국제전화가 많이 오는 것 같아요. 고모인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 당서기가 가끔 전화해서 ‘그런 말 하지 말라. 이런 행동 보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 같더군요.”

●고미 위원을 원망하던가요.

 “아뇨. 사과했더니 오히려 괜찮다고,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평양의 마음을 알았으니 조금 신경 써야 한다고 했어요. 결코 제 기사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만남은 그해 5월 16일 베이징 호텔 바(bar)에서 있었다. 새벽 1시가 다 된 시각이었는데, 사실 그때 고미 위원은 만나기로 한 김정남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낙심한 채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취중에 문득 휴대전화를 보니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김정남이 그를 애타게 찾은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즈음 김정남은 ‘일본 기자랑 만나지 마라’라는 주변의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고미씨가 좋다’며 어디선가 술을 마시다가 만나러 온 것이었다.

●만났을 땐 둘 다 취한 상태였겠네요.

 “그랬죠. 거기는 주로 2차, 3차로 술 마시러 오는 곳이라 안주도 땅콩밖에 없었어요. 김정남씨는 고가의 위스키를 많이 들이켰고, 저도 술이 약하지만 따라서 한두 잔 마셨습니다. 이야기 해보니 확실히 취했더라고요. 뭘 물어도 대답이 바로바로 안 나오고 ‘어…? 어?’ 이런 식으로.”

●특별히 기억나는 얘기는요.

 “100위안짜리가 지갑에서 막 나오기에 물었더니 ‘생활비는 유럽에서 투자하고 번 걸로 쓴다’고 하더군요. ‘당분간 북한은 바뀌지 않는다’고 확언하기도 했고. 하지만 사실 중간에 그냥 (취재는) 포기했어요. 새벽 3시까지 있었으니까 시간도 많았는데 자세한 내용들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쉽네요. 취했으면 오히려 취재가 쉬웠을 것 같은데.

 “저도 마카오에서 만났을 때는 작심하고 핵문제, 후계자 문제, 김정일의 건강… 그런 질문만 했어요. 이 사람이 언제 자리를 떠날지도 모르니까 계속 이슈나 현안에 대한 얘기만 했죠. 하지만 베이징에선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서로 얘기했어요. 모처럼 어렵게 만나서 술 마시는데 그냥 인간적인 얘기만 하고 싶었습니다. 더 친해지면 나중에 더 좋은 자리가 있겠지,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몰래 사진 찍고 녹음할 수도 있었겠죠. 다 챙겨갔으니까.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김정남이 왜 고미 위원을 친근하게 여겼을까요.

 “제가 (기자로서)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에요. 아마도 저의 ‘관심’ 때문일 겁니다. 그 사람 마음속엔 누군가 자기 생각을 알아줬음 좋겠다는 심정이 있어요. 저도 처음엔 마음이 들떴고 욕심이 있었습니다. 김정남씨와 은밀히 e-메일을 하면서 일주일에 하나씩 특종을 터뜨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죠.”

●그 마음이 바뀐 겁니까.

 “사실 그는 아주 신중한 사람이라 대단한 특종을 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민감한 이슈에 대해선 워낙에 말을 잘 골라서 했어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시간이 흐를수록 김정남씨에게 인간적인 관심이 생겼습니다. 북한의 기밀보다는 그 사람의 인생이나 생각 같은 걸 더 알고 싶어졌어요.”

독재자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김정일과 김정남이 1981년 8월 함께 찍은 사진. 김정남이 아버지와 찍은 사진 가운데 유일하게 공개한 사진이다.

 고미 위원은 종종 김정남이 걱정된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다. 부친상을 당한 김정남이 마음을 잘 추스르고 있길 바란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김정일과 김정남은 정이 깊은 부자간이었다고 한다. 김정남은 김정일이 자신을 스위스로 유학 보낼 때 매우 아쉬워하던 기억이 난다고 했고, 자신도 당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비록 ‘서양물’을 먹은 장남이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고 직언하면서 관계는 멀어졌고, 결국 떨어져 살게 됐지만 그 와중에도 국제전화는 자주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최근 알려진 김정일의 유서엔 ‘김정남을 많이 배려해라. 그 애는 나쁜 애가 아니다. 그의 애로를 덜어줄 것’이라고 쓰여 있다니 김정일도 마지막까지 왕위에서 밀려난 큰아들의 안위를 걱정한 셈이다.

●김정남은 김정일 장례식에 갔습니까.

 “간 것 같아요.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김정남씨와 친한 일본인에게 확인을 받은 내용입니다. 김정일 사후에 잠깐 평양에 가서 영결식에 참석하고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했다고 해요. 그 후에 마카오로 돌아왔는데 충격이 아주 커서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 얘기 듣고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김정남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죠.

 “그렇죠. 일례로 2010년 11월에 터진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해선 ‘아버지가 최근에 판단력이 많이 흐려져서 사건이 난 거다’라고 했습니다. 또 핵무기도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갈 수 있는 물건은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뚜렷이 밝혔고요. ‘이 세상에 정상적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면 3대 세습을 추종할 순 없을 것’이라고까지 했으니까요.”

●그런 말을 기자에게 거리낌없이 하다니 의외입니다.

 “김정남씨는 늘 자신은 북한 정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김정일 생전엔 아버지한테 하고 싶어하는 말 같았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후계자 신분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그 아버지가 매일 김정은과 돌아다니고 김정은만 쳐다보고… 한 번 사랑을 받아봤기 때문에 그걸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마흔도 넘은 남자인데요.

 “그 사람은 특별합니다. 권리·지위·돈 모든 걸 가졌는데 한 가지가 없어요. 사랑이요. 그 부분에 인간적으로 연민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새 부인(고영희:김정은의 생모)과 이복동생들에게 쏠리고, 그 와중에 어머니(성혜림)는 우울증을 앓다가 쓸쓸히 모스크바에서 죽고, 자신은 사실상 타향살이를 하고 있고…. 부모에 대한 사랑에 늘 목말라 했어요. 지금도 자신의 부인과 아이를 정말 끔찍이 아끼죠.”

김정남이 바꾼 ‘논픽션’ 인생

 인터뷰를 하는 동안 도쿄신문 사람들은 지나가며 고미 위원을 흘긋흘긋 쳐다봤다. ‘요즘 보기 힘드네?’ 하는 눈빛이다. 실제 요즘엔 스케줄이 많아졌다. 그의 저서가 대히트를 친 이후 강연 기회도 늘고 다른 언론매체에서 기고나 방송 출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회사에서 “어이, 부수입이 짭짤하니 퇴직금은 안 줘도 되지?”라고 무시무시한(?) 말을 하기도 한다고. 심지어 “힘든 기자 때려치우고 김정남 대변인 하면서 살면 되겠네”라며 비꼬는 사람도 있다.

●원래 이 분야 전문기자가 꿈이었나요.

 “아뇨. 제 꿈은 원래 소설가였어요. 대학도 와세다 제1문학부에 들어갔고 소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3학년 때 소설가였던 교수님이 제가 쓴 단편소설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미안한데 고미는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하셨어요. 그때 엄청 충격을 받아서 소설가를 포기해버렸습니다.(웃음)”

●이후에 기자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글 쓰는 게 여전히 너무 좋았거든요. 사실 제게 좀 안 맞았습니다. 주로 팀으로 취재를 했는데 저는 사교성이 그렇게 좋지도 못하고 숫기와 배짱이 두둑하지도 않았거든요. 문학에서 좌절한 것처럼 기자 일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국제뉴스를 맡아 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국내 뉴스보다 흥미로운 소재도 많고, 혼자서 뭔가를 추진해 나갈 수도 있었고요. 그러다 김정남씨를 계기로 한반도 문제로 관심이 굳어진 겁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전문성을 높여서 한·일, 북·일 관계에도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요. 사회현상이나 현실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재조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해석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어요. 뒤늦게 관심이 픽션(소설)에서 논픽션으로 바뀌었달까.(웃음)”

●김정남이 북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의 인간적인 부분,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 부분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외로움을 싫어하고, 혼자 있길 두려워하는 그런 부분이요. 지도자란 게 원래 외롭고 냉철함을 요구하는 자리지 않습니까. 그런 걸 못하는 성격이에요. 한국말로 ‘속정’이라고 하나요. 그런 면에선 어쩌면 김정일이 (후계자를) 잘 판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로서는 귀여운 아들이었지만요.”

●그럼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그건 좀 다른 문제예요. 그는 어쨌든 북한의 로열 패밀리고, 아직도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북한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지적하고 공개한 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사회가 달라질 수 있는 ‘명분’을 줄 수 있는 거니까요. 게다가 현재 중국은 김정남씨를 철저히 호위하고 있습니다. 감시이자 보호죠. 김정남씨도 그걸 알지만 ‘내 운명이니까 그냥 즐길 거다’라고 하더군요. 김정남씨가 중국과 연결돼서 앞으로 어떤 카드가 될지는 알 수 없죠.”

●그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한마디 하시죠. 신문을 볼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지난해 8월에 몸이 많이 아파 수술을 받고 입원했어요. 환자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앞으로 3~4일 대답 못합니다’라고 e-메일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정말 매일 메일을 보내오더군요. ‘고미씨는 아들과 아내가 있는데 건강하셔야 한다’고요. 일본 동료들도 병원까지는 안 오는데 ‘아, 결국 이분이 나를 가장 생각해 주는 친구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 출간에 대해서도 고민을 아주 많이 했어요. 김정남씨의 연락을 기다려볼 겁니다. 정보원을 통해 알게 된 싱가포르나 마카오 호텔에도 한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전에도 그랬듯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고 믿어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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