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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17세기 일본 방랑시인 ‘바쇼’를 따라서 (상) 동북해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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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마쓰시마(松島)는 일본 3대 절경이자 동북 해안 최고의 절경이다. 바쇼도 이 바다를 보기 위해 방랑에 나섰지만 막상 이 앞에서는 시를 쓰지 못했다. 그날 일기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적었다. [사진 이병률(시인·여행작가)]

소설가 김훈(63)씨가 특별한 일본 여행기를 보내왔다. 일본 막부 시대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1644~94)의 행적을 따라 일본 북부 지방을 돌아본 것이다. 은둔과 방랑으로 평생을 산 바쇼는 일본 전통 시가 하이쿠를 예술로 완성시킨 주인공이다. 아직도 일본에는 바쇼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행자가 많다. 김훈이 걸은 ‘바쇼의 길’을 2회에 걸쳐 싣는다.

3월 하순에 나는 일본 동북지방의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의 행적을 따라갔다. 그때 교토의 벚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기온 마루야마 공원의 오래된 수양 벚나무 아래 인근 주민들이 미리 자리를 깔고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공원에 모여서 꽃보다 먼저 피어나 있었다. 내가 서울에 돌아온 다음 날 그 벚나무는 꽃을 피웠다. 일본의 산천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만개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 일본 정부는 독도가 “본래부터 일본의 고유한 영토”라고 또 우겨댔다. 동북대지진에 보여준 한국민들의 우정에 감사하는 마음과 이웃의 영토에 대한 팽창주의가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는 겹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애매하다. 이 애매함은 모호함이라기보다는 다의성(多義性)에 가깝다. 흩날리는 사쿠라 꽃보라 뒤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어른거린다.

 일본 동북 절경을 따라가며 읽은 바쇼의 시구는 그 17개의 음절 뒤에서 말해지지 않은 무늬들이 피어나고 있다. 말하려는 욕망과 말을 버려야 한다는 극기 사이의 경계를 그는 노련한 무사의 칼 한번 휘두르기로 벤다. 바쇼의 선대가 하급무사 계급의 닌자(忍者)였다는 말은 정설이 아니지만, 그의 노래는 검객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다. 칼을 휘둘러서 상대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그었을 때 내 몸은 모든 각도에서 적의 공격에 노출된다. 그때, 순식간에 수세(守勢)를 회복하지 못하면 상대가 나를 벤다. 바쇼의 언어는 드러나는 것과 감추어지는 것 사이를 바람처럼 가르고 지나가는데, 그 단면에서 감추어진 것들이 저절로 드러날 때 그의 노래는 힘차다. 1684년 가을의 방랑길에 나설 때 그는 ‘무위자연의 낙원으로 들어간다’는 옛 시인의 말처럼 천 리 길에 식량을 준비하지 않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서 오두막집을 나섰다. 그는 먼 길을 건너갔지만 무위자연의 낙원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방랑 행각은 필사적이었고 그의 목표는 맹렬했다. 그의 맹렬한 목표는 방랑이었다. 그래서 그의 방랑의 내면은 질주에 가깝다. 그의 방랑 행각에는 비우기와 채우기가 겹쳐 있는데, 그 구분은 애매하다. 51세 되던 가을날, 그는 방랑길에서 죽었다. 그의 기세가(棄世歌: 세상을 버리는 노래)는 ‘길에서 병드니, 꿈은 메마른 들녘을 헤매는구나’였는데, 죽기 전에 이미 몸을 떠난 넋의 꿈은 여전히 맹렬하다.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여정은 1689년 5월 16일부터 10월 18일까지다. ‘오쿠’는 저 멀고 아득한 곳이라는 뜻인데, 그 입구는 센다이 동북쪽 시오가마 거리의 작은 길이다. ‘오쿠’로 가는 그의 여정은 도쿄→일본 동북해안→내륙횡단→우라니혼(裏日本)해안선→니가타→오가키로 이어졌다.

 센다이 북쪽 미야기현 마쓰시마 해안은 아늑한 만 안에 260여 개의 섬이 모여 있다. 여러 모양의 섬들이 멀고 또 가까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섬들은 마을의 풍광을 이룬다. 이 바다와 섬이 일본 동북의 절경이고, 바쇼의 여행 목적도 이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바쇼가 왔을 때는 혼자서 명상하는 은자들이 소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 해안선에서 바쇼는 “신들이 살던 먼 옛날”의 산천을 생각했다. 바다 쪽으로 창을 낸 여관 2층 방에 누우니 “대자연의 풍광 한가운데서 노숙하는 것 같았다”고 그는 일기에 썼다. 그러나 바쇼는 이 절경에서 시를 쓰지 않았다. 풍광의 내면이 너무나 완벽히 드러나 있어서 거기에 언어를 밀어넣을 수가 없었던 것인지, 바쇼는 “다만 입을 다물고 자려 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지금 마쓰시마 항만시설과 동쪽 섬의 일부가 지진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섬들이 빚어내는 풍광과 아름다움은 훼손되지 않고 있었다. 그 풍광은 무위자연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인공적 조형미의 세계를 펼쳐준다. 그래서 그 섬들은 손으로 주무를 수 있고 재배치할 수도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바쇼는 그 섬의 소나무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인데도 마치 사람이 일부러 휘게 해서 모양을 만든 것인가 생각될 만큼 아름다웠다”고 일기에 적었다. 마쓰시마에서는 무위자연이 조형적 미의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바쇼는 1689년 6월 25일 마쓰시마를 떠나서 29일에 이치노세키 관문을 넘어서 히라이즈미(平泉)로 들어왔다. 히라이즈미는 바쇼의 시대로부터 500여 년 전 후지와라(藤原)가문 3대에 걸친 일본 귀족문화의 정수가 엄중한 관리 아래 보존되어 있고(세계문화유산),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 가며 싸우던 전쟁터는 이제는 논밭이거나 공터다.

히라이즈미 모쓰지에 있는 정토정원.

 히라이즈미의 모쓰지(毛越寺)는 후지와라의 3대 영주 히데히라(秀衡·1122∼87)가 완성한 사찰이다. 그 절의 ‘정토(淨土)정원’은 부처의 나라를 현세의 땅 위에서 보여주는 연못이다. 서쪽으로 10만억 나라를 지나면 아미타불이 사는 땅에 닿는다는데 정토연못은 그 멀고먼 사방정토를 조형으로 표현했다. 멀고 가깝고, 또 부드럽고 가파른 여러 해안선을 연못 둘레에 표현해 놓았고 물가의 곡선은 숨고 또 나타나서 시각마다 느낌이 다르게 설계되었다. 자연과 합일하는 것이 정토의 이상인데, 그 연못은 인공의 극한에서 자연을 불러들인다. 마쓰시마의 풍광이 자연으로 인공을 향한다면, 하라이즈미의 정토정원은 인공으로 자연을 지향한다. 바쇼의 행각 속에서는 그 두 갈래의 길이 결국은 같은 길이다. 후지와라 가문은 참혹한 전쟁 끝에 멸망했고 비운의 젊은 영웅 요시쓰네(義經·1159∼89)도 그 싸움에서 죽었다. 요시쓰네는 지금까지 일본 사람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무사다. 요시쓰네의 군대가 무너진 싸움터는 히라이즈미의 북쪽, 기타카에 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원이다. 바쇼가 왔을 때 이 고원에는 풀이 우거져 있었다. 거기서 바쇼는 시구를 한 줄 얻었다.

 “여름 풀이여

무사들의 꿈의 자취.”

 허무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칼처럼 휘젓고 지나가는데, 문장은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고 ‘풀’과 ‘꿈’을 대치시킬 뿐이다. 여기서부터 한 달쯤 후에 바쇼는 시골 신사에 소장된 사네로리라는 무사의 투구와 갑옷을 보았다. 용머리 쇠장식에 국화문양이 금박된 최정상급 무사의 투구였다. 그 갑옷 앞에서 바쇼는 또 한 줄을 얻었다.

 “참혹하구나

갑옷 밑의 귀뚜라미 울음소리.”

 ‘여름 풀’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장은 여전히 아무것도 애도하지 않는다. 슬픔은 극한에까지 억압된 다음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바쇼는 애도하지 않았지만, 젊어서 죽은 청년무사 요시쓰네의 사당에는 이 시대의 왜소한 사내들을 인정할 수 없는 젊은 여성들이 몰려와서 옛 영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상) 끝>

센다이=김훈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왼쪽 동상)=일본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방랑시인. 300년 전 인물이지만 일본에서는 대중적인 인기가 여전하다. 2000년 아사히신문이 발표한 일본 작가 인기투표에서도 6위에 올랐다. 일본 전국에 바쇼 시비만 4000개가 넘는다.

◆하이쿠(俳句)=5·7·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短詩). 특정한 달이나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季語)가 꼭 들어가야 한다.

※도움말 주신 분 : 김정례 전남대 일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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