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부채 땜질처방 이제 그만] 上. 빚더미에 왜 앉았나

중앙일보

입력

이번 주에 '농어업인 부채 경감 특별법' 이 국회를 통과하면 4조5천억원 가량의 세금이 다시 농어가 빚 부담 덜기에 지원된다.

지난 20년간 열다섯번째 동원되는 대책이다. 농어업과 농어가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세금으로 농어가 빚 부담 덜기를 되풀이해야 하느냐는 점에는 이견이 많다. 농어가 부채의 실상과 원인, 정부 대책의 허와 실 및 책임을 파헤치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싣는다.

농가부채는 90년대 중반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빚도 늘지만 그보다는 원리금을 갚을 농가 소득이 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99년말현재 농가 가구당 평균 빚은 1천8백53만원으로 95년의 두배 수준이다.하지만 소득은 2천2백32만원으로 95년(2천1백80만원)수준에 머물러 있다.도시가구와 소득차이는 94년까지는 1% 남짓이었으나 최근에는 16%로 벌어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실상이 좀 달라진다.부채규모별로 보면 빚이 한푼도 없는 농가가 22%이며 3천만원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는 농가는 전체의 21%다.소득수준과 비교해보면 빚이 많을수록 소득도 많고,빚이 적을 수록 소득도 적은 구조다.

연령별로 나눠보면 45세 미만은 3천만원이상,60세 이상은 1천3백만원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젊을 수록 빚이 많은 셈이다.

농가들이 빚만 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빚을 얻어 늘린 농지나 농기계,주택 등 자산도 만만치 않다.빚이 가장 많은 30대(평균 3천9백47만원)의 평균 자산은 2억8백80만원 수준이다.그러나 빚은 현금으로 갚아야하는데,필요할 때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유동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다.소득은 크게 늘지 않으니 빚을 얻어 빚을 갚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 박성태 박사는 “결국 농가부채는 시설투자를 활발히 해온 일부 젊은 농민의 문제이자 운영자금이 부족한 유동성의 문제로 볼 수 있다”며 “농업을 이끌어갈 젊은 농민의 부채부담이 소득수준보다 과중한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경제성 무시한 농업정책=현재 농가부채문제의 1차원인은 92년부터 시작된 42조원 규모의 농촌구조개선사업이 손꼽힌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과 농산물시장개방에 따라 하루빨리 선진농업체제를 갖춘다는 목표아래 사상 유례없는 자금을 농촌에 쏟아부었다.

이중 60%의 자금이 수리시설 ·경지정리 ·도로망확충과 같은 농업기반조성사업에 쓰였고,나머지 40%는 농민들의 시설자금·기계화자금 등으로 쓰였다.

워낙 많은 돈을 단기간에 쏟아붓는 과정에서 정책자금이 모텔과 다방 운영,사채놀이에 쓰이는 등 ‘모럴헤저드’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아무튼 이같은 시설투자는 농산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시장에서는 공급과잉이라는 문제로 이어졌다.게다가 빚을 갚기 시작해야할 시점인 97년에 터진 외환위기로 소비가 급격히 줄면서 농민들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는 것이 농림부의 분석이다.

김동근 농림부차관은 “당시 자금의 40%는 무상,40%는 융자,농민부담은 20%에 불과하다 보니 앞다퉈 유리온실을 짓고 축사를 개량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지금은 이같은 투자가 문제로 지적되는 상황이지만,당시로서는 하루빨리 선진영농을 이뤄내야 한다는 위기감이 컸고,또 이사업 덕택에 농업기반이 빨리 자리잡은 효과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농어촌사회연구소 송동흠연구원은 “농촌별 특성과 수요를 감안하지 않고 정부가 미리 정해놓은 모델과 지원목표치에 따라 지역공무원들이 실적을 맞추기 위해 젊은 사람이면 능력도 보지 않고 무조건 지원대상을 선정했을 정도”라며 “어떻게 강원 ·호남 ·영남 할 것 없이 똑같이 유리온실을 지을 수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농촌경제연구원 김정호 박사는 “농민들에게 이만큼 돈을 지원했으니 앞으로 돈도 많이 벌고 수출도 잘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한 셈”이라며 “시설투자도 중요하지만 ▶공급 ·가격조절 시스템 ▶농업기술지도 ▶해외농산물 ·수출정보 ▶마케팅과 원가 ·감가상각 ·투자비회수개념을 높이는 경영교육 등 소프트웨어 투자도 함께 이뤄져야 했다”고 말했다.

◇빚 갚을 능력은=부채문제의 핵심은 상환능력에 있는데,이점이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농협 김두년 금융경제실장은 “이제는 시장개방,생산성향상에 따른 공급과잉,농자재가격 ·인건비의 상승,농산물 소비감소,수출부진 등의 영향으로 어떤 농산물에서도 소득을 크게 낼 부분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수출은 97년 15억달러수준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농산물판매가격은 쌀만 정부의 수매가인상정책으로 95년보다 31%증가했을 뿐,나머지 채소 ·육류는 각각 95년의 95%와 96%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 농가소득에서 농외소득(농업외 부분의 취업·겸업·투자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일본은 70%,대만은 55%이지만 우리는 31.5%에 불과하다.농촌경제연구원 이동필 박사는 “그동안 농공단지 조성정책 등으로 농외소득과 농외취업인력수가 계속 증가하다 97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며 “교육 ·의료 ·문화등 모든 기본시설이 취약하다보니 젊은 층은 이탈하고 기업들은 인근 농촌에서 채용할 인력이 없어 더욱 기피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충북대 성진근 교수는 “농업수익률이 정책자금의 금리에도 못미치는 4∼5%수준에 불과해 아무리 상환조건을 개선해도 도저히 빚을 갚을 구조가 못된다”며 “수익률과 이자율간의 차이를 직불제 형태로 메워주는 한편 농가 소득을 늘릴 수 있는 방법에 정책의 촛점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경제부=이효준.송상훈 기자
전국부=정기환.양영유.구두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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