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더 비싼 '문안의 문' 냉장고 불티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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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25년째 전자제품 디자인 ‘외길 인생’을 걸어온 유선일 전문위원은 “‘고객이 필요로 하는 핵심 가치를 구현했느냐’가 전자제품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이나 냉장고 문을 열까. 업계 조사에 따르면 4인 가족 기준으로 하루 평균 40회다. 한 명이 하루 10번은 냉장고 문을 여는 셈이다.

 “작은 통 하나 꺼내려고 그 큰 문을 열어야 할까? 냉기가 다 빠져나가 전기료도 많이 나오는데….”

 2009년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유선일(51) 전문위원이 던진 질문이다. 당시에도 프리미엄 제품인 양문형 냉장고는 물병만 따로 넣을 수 있는 홈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냉장고 문을 여는 횟수가 획기적으로 줄지 않았다. 유 위원이 찾은 답은 ‘문 안의 문’. 홈바를 확장한 개념이다. 이 디자인은 ‘매직스페이스’란 이름으로 2010년 양문형 냉장고에 처음 도입돼 2년 만에 전체 양문형 냉장고 60%에 적용되고 있다. 올해부터 일반형 냉장고에도 적용됐다.

 유 위원은 “패션 디자인은 예쁜 게 중요하지만 전자제품은 아니다”며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객이 필요로 하는 걸 디자인으로 실현시키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6년 금성사 시절 LG전자에 디자이너로 입사해 25년간 전자제품 디자인 외길을 걸어왔다. 디자인경영센터 내 7명의 전문위원 중 최고참이기도 하다.

 그는 “애플의 아이폰이 스마트폰의 대명사가 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사실 노키아가 애플보다 10년가량 앞서 ‘노키아 9000’이란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하지만 쿼티 자판이 달린 노키아 9000은 무거웠고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아이폰은 홈 버튼 하나를 제외한 모든 버튼을 없앴다. ‘쉬운 스마트폰’이라는 고객 가치를 구현한 셈이다. 유 위원은 “스펙이 좋아서 아이폰을 사는 게 아니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가치를 구현하느냐’가 전자제품의 성패를 가른다”고 말했다.

유선일 위원의 대표 디자인① 미국형 3도어 냉장고=미국 최초로 냉장실에 양문형 디자인 적용. ② 매직스페이스 양문형 냉장고=자주꺼내는 물병·반찬통 등을 따로 보관할 수 있게 ‘문 안의 문’ 개념 도입. ③ 매직스페이스 일반형 냉장고=양문형 냉장고에만 적용되던 ‘문 안의 문’을 일반형에도 도입. [자료 : LG전자]

 고객 가치를 구현한 디자인이 완성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디자인을 제품에 적용하려면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유 위원은 “바로 이 단계에서 혁신적인 디자인이 수장된다”고 말했다. 기술을 개발하고, 기존 공정을 바꾸려면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문 안의 문’ 디자인을 처음 적용하던 때 얘기를 꺼냈다. 반찬통도 꺼낼 수 있게 기존 홈바보다 문의 크기를 늘리고 안쪽에 바구니를 달기로 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냉장고 문의 두께를 1mm 줄여야 하는 큰 공사였다. 두께를 줄이려면 냉기 노즐의 위치가 달라져야 한다. 생산 라인까지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전자제품 디자인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근거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비용을 감수하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디자이너들은 근거를 만드는 데 약하다고 보고 유 위원은 고객 심층 인터뷰나 시나리오 작성 기법·24시간 비디오 촬영 같은 방법을 자주 쓴다.

 일반형 냉장고에 ‘문 안의 문’ 디자인을 도입할 때도 근거가 있었다. 이 디자인은 사실 남미에서 먼저 시도됐다. 더운 남미에선 물이나 맥주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자주 열 수밖에 없다. 한데 직접 가보니 남미 부엌 구조는 통로가 좁고 긴 형태가 주를 이뤘다. 냉장고 문을 열면 통로가 꽉 차서 사람 하나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매직스페이스 일반형 냉장고를 탄생시켰다.

 LG전자는 지난달 말 국내에도 이 제품을 출시했다. 여기에도 근거는 있었다. 유 위원은 “1인 가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이들에겐 필요한 건 작으면서도 편리한 일반형 냉장고”라고 말했다. 이 제품은 100만원대 초반으로 기존 제품 보다 60%가량 비싸지만 출시 한 달 만에 700대나 팔렸다.

전자제품 디자인은 이렇게

● 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가치를 넣어라.
● 고객 가치는 생각해 내는 게 아니다. 조사해서 알아내라.
● 디자인에는 비용이 든다. 비용을 감수하자고 설득할
근거를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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