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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중딩’들의 분노 게이지를 높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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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강홍준
논설위원

전국 중학교는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다. 학부모들이 예민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 단지엔 ‘벽에 못도 박지 말라’는 안내문이 나붙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속에서 열불 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중학생들이다. 강남만 그런 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 그렇다. 사회·역사·도덕·음악·미술 등 과목 시험 범위가 심하게는 200페이지 가까이 된다. 과거 같으면 3개년에 나눠 배울 이런 과목을 1년 안에 몰아 배우는 집중이수제가 올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시험 범위가 고시 과목 수준이 됐다. 혹시 주변에 중학생이 있다면 집중이수제의 ‘집’자도 꺼내지 말라. 얼굴 표정부터 달라진다.

 여성가족부의 안티가 게임을 규제당한 초등학생이라면 교육과학기술부의 안티는 분명 중학생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집중이수제가 무엇이길래 이들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켰을까.

 현 정부는 2009년 교육과정을 뜯어고치면서 이 제도를 도입했다. 물론 다른 교육정책과 마찬가지로 시작할 때 취지는 좋았다. 학생들의 이수 과목 수를 줄여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 학기 10~13개였던 이수과목을 8개 이하로 축소하라는 지시가 교과부에서 교육청을 거쳐 학교로 떨어졌다. 학교는 3년간 이수해야 할 과목 수는 그대로인데 학기당 이수 과목 수는 줄이기 위해 3년 배울 걸 1년 안에 끝내는 식으로 교육과정을 짰다. 물론 국어·영어·수학은 3년간 골고루 배우게 하니 1년에 몰아치기 교육의 피해는 고스란히 기타 과목들이 보게 됐다. 1학년 아이가 서양 철학자 이름이 줄줄 나오는 교과서를 들고 부모에게 와 “이게 무슨 말인가요”라고 묻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전국 3221개 중학교 가운데 무려 2806개(87.1%)가 1년 안에 도덕 과목을 몰아치기로 끝낸다.

 더 황당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중학교 시기에 전학하는 아이는 그걸 경험할 것이다. 전학 온 아이는 이미 전 학교에서 배운 과목을 다시 배우거나 전 학교에서도, 현 학교에서도 아예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전학 간 학교가 이미 집중이수제로 과목을 끝냈다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과부는 전국 각 지역에 있는 지역교육청 단위로 학교를 지정해 전학 학생이 못 배운 과목을 배우게 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그런데 학생이 희망해야 배울 수 있고, 어떤 지역 학교는 자기 주도 학습이라는 명목으로 혼자 공부하도록 시키게 하거나 과제물 등을 제출하면 이수한 것으로 간주해 주기도 한다. 매년 중학교에서 전학하는 숫자가 전체 학생의 3.5%(6만6000여 명)나 된다고 하니 많은 아이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셈이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북 영주의 한 중학생 자살 사건에서도 집중이수제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담임교사는 그 아이를 수업 시간엔 볼 수 없었다. 담임교사가 집중이수제로 인해 다른 학년 수업을 맡았다. 자살한 학생이 지속적인 학교폭력에 시달리며 자살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검사를 지난해 받았는데도 담임교사는 그 사정을 잘 몰랐다.

 중학생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분노 게이지를 낮춰 주려면 집중이수제 문제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번 큰 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건물 다 짓고, 사람이 살고 있는데 설계도를 다시 바꿔 짓겠으니 건물 밖으로 나가라고 하면 어느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결국 교과부가 문제를 꼬이게 한 만큼 꼬인 대목을 직접 풀 수밖에 없다. 학기당 8개 이내라는 지시를 ‘학교 사정에 맞게’로 바꿔야 한다. 이명박(MB)정부가 입이 부르트도록 말했던 학교의 자율권 확대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무튼 집중이수제는 정부가 현실도 모르고 교육정책을 펴면 고생은 아이들이 다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생생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