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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외교관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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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외교로 전쟁을 막은 고려의 서희(徐熙) 못지않은 인물이 고조선의 대부(大夫) 예(禮)였다. 중국 전국(戰國)시대(서기전 475~서기전 221) 고조선은 만주 전역을 장악한 북방 강국으로서 전국 칠웅(七雄) 중 가장 북쪽에 있던 연(燕)나라와 자주 부딪쳤다. 『삼국지(三國志)』 ‘위략(魏略)’은 ‘연나라가 왕을 칭하면서 동쪽을 공격하려 하자 고조선도 이에 맞서 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고 전한다. 이때 고조선의 대부 예(禮)가 전쟁불가론을 주장하면서 고조선을 설득하고 또 연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전쟁을 막았다.

 외교에서는 영원한 우방(友邦)도 적방(敵方)도 없다. 조선과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 명나라는 조선에서 보낸 국서에 무례한 구절이 있다는 표전(表箋)문제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조선에서 거부하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 개국 1등공신 정총(鄭摠)과 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 등의 사신들을 억류했다. 조선 태조 6년(1397) 11월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죽자 정총이 주원장이 내려준 옷 대신 흰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정총 등의 조선 사신들을 죽였다. 그래서 격분한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결심했던 것이다.

 태종 6년(1406) 명나라 성조(成祖)는 안남(安南: 베트남)을 침략해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키고는 내사(內史) 정승(鄭昇)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전했다. 조선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이때 태종은 “나는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태종실록』 7년 4월 8일)”라고 말했다. 사대 외교로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는 한편 그래도 공격하면 결사항전 하겠다는 의지였다. 조선 후기의 망국적 사대주의와는 달리 조선 초기의 사대주의는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의 하나였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서 자공(子貢)이 “어떻게 하면 선비(士)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고 할 수 있다”라고 답했다. 선비의 중요한 자질이 외교관의 능력이란 것이다.

 그간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자질과 행태가 문제가 된 적은 많다. 한 중국 여인에게 ‘손가락을 잘라드리겠다’는 각서를 써 준 외교관이 있었는가 하면 살인누명을 쓰고 이집트에 투옥된 한지수씨라는 여성에게 확인서만 발급해주면 석방시켜 주겠다는데도 발급을 거부한 대사도 있었다. 왜 비싼 세금을 들여 해외공관을 운영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 한 사건들이었다. 새로 출범하는 국립외교원은 공자의 말처럼 선비정신을 지닌 외교관을 배출해야 할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