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 뒤 길옥윤, 사과 대신 곡을 써 슬쩍 보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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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가수 패티김의 삶은 가수로도, 한 인간으로서도 열정 그 자체였다. 사진은 지난 2월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사진 촬영에 응한 패티김의 모습. [중앙포토]

자유인인 가수 조영남에게도 ‘어려운 분’들이 있다. 그가 “중전마마이자 누님”으로 모시는 패티김과 이미자다. 그 중 한 사람인 패티김의 자서전을 직접 쓰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나온 책이 ‘조영남이 묻고 패티김이 답한’ 문답형식의 자서전 『그녀, 패티김』(돌베개)이다.

책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가수 패티김과 함께 조금은 느슨한 인간 김혜자의 모습도 담겼다.

 2월 은퇴 선언에 앞서, 지난해 8월부터 넉 달 간 조영남과 주고 받은 이야기 속에서 완벽주의자 패티김은 무장해제된 듯했다. 하긴, 세상 물정에 어둡고 자전거도 못 타는 패티김에게 ‘띨띨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 “남자 복은 몰라도 작곡가 복은 확실히 타고났다”고 말할 정도로 거침없는 사람, 조영남이니 패티김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있었을 터다.

 패티김의 아버지는 민주일보 발행인 김인현씨고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온 당시의 인텔리였다. 그 역시 어렸을 때는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를 꿈꿨었다. 하지만 가수로서 그의 재능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중학생 때 우연히 몇 소절 부른 판소리 가락을 들은 학교 선생이 국립국악원에서 무료로 배울 수 있게 주선해준 게 계기가 돼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패티김은 그 시절 연습한 발성이 평생 노래의 기초가 됐다고 말한다.

 책에는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데뷔한 뒤 미국에 진출해 좌절을 맛봤던 이야기부터 한국의 대표적 작곡가로 꼽히는 박춘석·길옥윤 선생과의 인연까지 파란만장했던 54년 가수 생활을 자신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되돌아봤다. 길옥윤 선생과의 만남과 결혼, 이혼 등에 얽힌 이야기도 진솔하게 털어놨다.

 길옥윤씨와 살 때 부부싸움을 하면 길씨는 사과 대신 곡을 써 제자를 시켜 패티김에게 슬쩍 전해줬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 중 하나가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한다. 패티김은 “말도 없고 내성적이었던 그 사람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음악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공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무대 의상을 입은 뒤에는 행여 주름이 질까 자리에도 앉지 않는다는 완벽주의자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홀로 컵라면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너무 배고프고 너무 외롭다”고 쓸쓸해 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부분, 약하고 아프고 그런 부분들은 다 있다”며 솔직한 면모도 드러낸다.

 한국 대중음악에 한가운데 서 있던 패티김과 조영남. 두 사람의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종횡무진한다. 조영남의 코멘트도 재미있다.

 정작 자서전을 맡겨 놓기는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걸까. 패티김은 조영남에게 “네 스타일로 설렁설렁, 놀멘놀멘 그렇게 쓰지 말고 나의 라이프 스토리를 아름다운 기록으로 남게 해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조영남이 패티김에게 바친 헌사만으로도 책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스타란, 별이란 멀리 존재하면서 반짝여야 한다. 역사상 개국 이래 패티김 만큼 반짝임이 긴 가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패티김 같은 별이 존재하지 않을 것, 아니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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