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벤처들] 下. '진짜 벤처' 를 살리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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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준.진승현사건에 화만 내고 있을순 없지요. 이럴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한 대기업에 이달 중 2만여개의 부품을 공급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취소 당한 인터넷 칩 업체인 A사의 金사장은 담담하게 말한다.

*** 기술개발만이 벤처의길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서 엉뚱한 금융사고의 유탄까지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벤처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에선 지금이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금 벤처사정은 한마디로 '뒤주에 쌀이 썩는데 밖에서는 굶주리는 격' 이다. 5일 코스닥지수는 66.96으로 3월 초 연중 최고치(283.44)의 4분의 1선으로 추락했다.

게다가 코스닥 등록을 기대하며 창업초기 벤처에 잠긴 이른바 '프리코스닥' 자금이 10조원은 넘는다고 한다.

인터넷기업협회 이금룡 회장은 "그만한 돈이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묶여있는 게 큰 일" 이라며 최근의 자금난을 대변했다.

자금이 돌지 않으니 신규투자도 얼어붙었다. 벤처캐피털.창업투자사 가운데 자금이 안모여 개점휴업에 들어가는 곳이 속속 생겨나다 보니 인터넷기업에 눈돌릴 여유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KTB네트워크의 권오용 상무는 "연.기금 등 장기투자자를 유도해 시장에 활력을 찾아줄 필요가 있다" 며 "미국 나스닥처럼 진입.퇴출과정이 쉽고 투명해지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성이 크다" 고 말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이광훈 박사는 "주가를 부양하겠다는 접근이 아니라 시장이 제대로 된 기업을 고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 인프라 구축 지원 필요

지난 5일 열린 '한민족 벤처네트워크' 에 참석한 미국 암벡스그룹의 이종문 회장은 진승현사건 등 일련의 스캔들에 대해 "탁자 밑에서 이뤄지는 어두운 거래, 프로의식이 부족한 기업가, 문제점을 감추려고만 하는 기업문화, 부족한 전문인력 등이 원인" 이라고 지적했다.

클릭TV의 정용빈 사장은 "벤처기업은 아이디어 하나로 일확천금을 벌기 위해 태어난 집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술과 철학을 진지한 열정으로 이뤄내기 위해 모인 것 아니냐" 고 반문했다.

벤처 CEO 43명을 대상으로 한 본사 설문조사에서도 80% 이상이 "곁눈질 않고 기술개발에 매진하는 길만이 벤처가 살 길" 이라는 입장이었다.

올바른 심사.평가기관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대한상공회의소 이경상 연구원은 "진짜 벤처를 가려내기 위해 제대로 된 기술심사 공인기관이 많이 생겨 투자자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며 정부가 이 부분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정승화 교수는 "제도적으로 코스닥 등 기업 평가의 잣대도 공정하고 투명해져야 한다" 고 지적했다.

사외이사 등 각종 감시제도가 적어도 거래소 수준으로 강화돼야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한편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자금지원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건강한 인프라의 구축 등 간접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벤처 CEO 응답자의 70%가 "정부는 시장의 룰이 잘 돌아가도록 분위기만 조성하면 된다" 는 입장을 보였다.

레떼컴의 김경익 사장은 "그간 코스닥등록 과정 등 주요 정책에서 정부의 자세가 들쭉날쭉했던 감이 있다" 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의 박팔현 연구위원은 "돈줄이 막힌 마당에 당장 벤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해결책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중장기적으로 벤처 토양을 건전하게 바꿔야 한다" 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정통부 인터넷정책과 황철증 과장은 "인터넷기업들의 활동을 막는 여러 규제를 계속 풀어가고 있다" 며 "벤처펀드와 같은 직접 지원방식을 유지하면서 해외진출과 마케팅 지원 등 인프라 구축에도 힘을 쏟을 것" 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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