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성석제 새 장편 '순정'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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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에서,내가 보고 겪고 들었으며 앓고 갈무리한 현실의 순수한 재현보다는,순정한 가짜를 선택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소설은 순진한 척하는 나쁜 소설이다. 영리하고 바쁜 도둑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한숨 돌리기를 바란다."

젊은 작가 중 소설을 진짜 소설답게 쓰는 몇 안되는 작가가 성석제(40) 씨다.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남의 이야기,아니 보고 듣지는 못했지만 있을 법한 일들을 꾸며서 재미 있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작가가 성씨다.

그런 성씨가 이번에는 장편 '순정'(문학동네) 을 내주 초에 내놓는다. 1986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94년부터 소설을 펴내기 시작해 10권 이상의 장편과 소설집을 펴냈으니 엄청난 창작력이다.

이번의 '순정'도 성씨의 많은 다른 소설들 처럼 가짜 공간에서 가짜 인물들이 펼치는 순정한 가짜 이야기다.소설의 무대는 지도에는 없는 지방 소도시 은척.그곳 시장통 작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치도라는 젊은이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러나 이 소설의 읽을 맛과 깊이는 성장 과정이라는 줄거리나 주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씨가 소설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 나온다.

"'아흠…좋다,좋아.' 춘매는 좋아라 호박을 안았다…그러자 하늘에 연결된 덩굴까지 뚝 떨어져 춘매는 덩굴째로 호박을 안게 됐다…호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춘매의 몸은 아득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작부 춘매는 이러한 태몽과 함께 이치도를 낳는다. 이 태몽은 또 춘매와 땜쟁이 봉팔과의 정사 묘사와 겹쳐진다. 흔히 영웅의 탄생에는 상서로운 태몽이 따르게 마련인데 떨어져내리는 추락과 정사 이미지가 겹쳤으니 홍길동 저리가라며 천하의 도적을 꿈꾸는 이치도의 성장과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초등학교 시절 만화방에서 도둑질하고 중학시절 성당에서 성배를 훔치고 도회지로 나와 더 큰 도둑질을 하려던 이치도는 계속 쫓기는 것으로 작품의 시작과 끝을 맺는다.

그 중간 중간 은척에서의 삶과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태가 이 소설을 살아있게 만든다. 동서양 고전에서 두루두루 따왔음직한 작가의 말놀이와 특히 사회 밑바닥 인물들의 희화적 묘사가 이 소설에 현실감을 주면서도 보편적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돌려준다.

"그건 개였다.아니 늑대였다.아니 여우였다. 아니 은척 근처에만 산다는 호랑이 새끼, 지나가는 나그네의 머리 위를 건너 뛰며 혼을 빼고 결국은 간만 빼먹고 간다는 개호주였다."

이치도가 어릴적 은척 읍내를 처음 빠져나왔을 때의 그 개호주는 도회지에서 다시 은척으로 숨어드는 마지막 부분에도 다시 나타난다. 다시 숨어든 은척에는 악다구니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허물어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때문에 악다구니와 판소리 사설조로 재미있게 우리 공동체 삶의 한 원형을 복원한 소설로 읽을 수 있다.

현대화·세계화라는 개호주에게 쫓기고 홀리는 우리들에게 작가는 '순정의 위안처'을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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