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강운구의 쉬운 풍경 <5> 텔레비 쓰레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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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전남 영암 금정, 1995. ⓒ강운구

내가 텔레비에 나왔다. 아니 들어갔다.

텔레비전 수상기는 이중의 틀이다. 기계이기도 하고 액자이기도 한 그 틀 속에선 아주 많은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일렁인다.

나는 텔레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한두 번 방송국 스튜디오에 가본 적은 있다. 거기서는 관습상의 불공정한 게임이 진행되는 듯하다. 스튜디오에 막 불려 나온 이가 복잡한 장비들과 눈부신 조명… 같은 낯선 환경에 얼떨떨해하며 그 곤혹스러움에 좀 적응하기도 전에 방송국 시스템에 익숙한 전문가와 함께 ‘출연’을 하게 하는 걸 그이들은 아마 불공정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 나가서 더듬거리지도 않고 말끔하게 연기(?)까지 잘하는 세련된 인사들을 존경은 하지만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불특정 다수가 내 서툰 말을 들으며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몸이 언다. 어쩌다가라도 텔레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점엔 이런 저런 이념보다는 생리적인 탓이 크다. 오래 전에 이리저리 빼다가 출연을 요청한 한 피디와 만난 적이 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이가 하는 말이 “괜찮으신데 왜 그러세요? 저는…” 였다.

이 땅, 산하에 버려진 텔레비 수상기를 한때 좀 찍었다. 쓰레기장에 있는 그것들보다는 엉뚱하게도 좋은 경치나 전통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뒹구는 것들을 찾아서 온 나라를 쏘다녔다. 그런 사진으로 뭔가를 말하려면 여러 장을 제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진을 전시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참 힘드셨겠어요. 저걸 다 가지고 다니며 설치하려면…” 했다.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직접 한 ‘설치’로 볼 수 있을 만큼 알맞은 곳에 그럴싸하게 버려진 것을 찾아냈다는 점이 흐뭇했다.

다만 나는 ‘자동설치’를 찾아내 내 틀에 담았을 뿐이다. 이젠 눈치가 생겨서 어떤 곳에 가면 그런 게 버려져 있을지를 거의 알게 되었으며, 아직도 그런 걸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인류사에서 아마 우리가 텔레비 수상기를 산하에 쓰레기로 버린 최초이며 유일한 인류가 아닐까? 올해 말이면 우리는 더 문명 되게 되어 한 방송 형식을 종료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아날로그 텔레비 수상기 ‘자동설치’가 이 땅 곳곳에 널릴 것이다.

◆ 바로 잡습니다.=4월 7일자 강운구 쉬운풍경 본문 중 ‘기도下라’ 는 ‘기도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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