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환율 진정은 됐지만 불안감 여전

중앙일보

입력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한 지 5일째인 24일 오전 원화가치는 1천2백원선까지 깨뜨리며 폭락세를 이어가다 오후 들어 진정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장 바닥에는 아직도 불안감이 걷히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당국자들은 "3년 전 외환위기 때와는 엄연히 다르다. 머잖아 진정될 것이다" 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선 정부가 여러가지 국내 상황을 고려해 최근의 하락세를 용인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일고 있다.

◇ 원화가치 왜 계속 떨어지나=정치 불안.구조조정 지연 등으로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 20일 이후의 폭락세는 해외 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정정(政情)혼란으로 인해 대만과 일본의 통화가치가 급락한 때문이다.

이달 초부터 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줄줄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1천1백30원대에서 안정세를 보이던 원화가치는 지난 주말 이후 대만달러가 연중 최저치로 떨어지자 덩달아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던 것.

이후 원화는 ▶국내 증시에 투자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환위험 회피 수요▶불안심리로 인한 국내 기업 및 금융기관들의 가수요▶시세차익을 노린 일부 투기세력의 가세로 걷잡을 수 없는 하락세에 휘말렸다.

그간 외국인들은 원화가치가 연초부터 큰 변동이 없자 원화 투자분을 미리 달러로 바꿔놓는 작업을 거의 내놓지 않았다가 최근 원화가 약세로 반전하면서 허둥지둥 달러 매입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상경 국제금융연수원장은 "국내 증시에 들어와 있는 약 5백50억달러의 외국인 투자자금 중 60억~70억달러 가량만이 헤지(환위험 회피)를 했었다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면서 "이들 세력이 주도적으로 달러 매입에 나서자 불안을 느낀 국내 기업 및 개인들도 덩달아 이 대열에 나서고 있다" 고 말했다.

◇ 정부 대처, 안하나 못하나=정부는 최근의 원화가치 하락세가 급격한 것은 우려할 일이나 즉각 개입할 만큼의 위기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원화는 지난해 말에 비해 4.6% 절하되는데 그쳐 일본(7.3%)이나 여타 동남아 국가들(15~25%)에 비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 이에 따라 지난 며칠새 정부는 시장을 예의주시하고만 있는 상태다.

전광우 국제금융센터 소장은 "현재로선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해도 추세를 되돌릴 수 없으므로 정부 개입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면서 "오히려 원화가치 하락이 우리 경제의 유일한 견인차인 수출 증진에 보탬이 되므로 굳이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도 없다고 본다" 는 의견을 밝혔다.

시중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정부가 원화가치 하락세를 잡으려 했다면 이번 주초에 했어야 할 것" 이라며 "최근의 국회 공전이나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 반발에 정부가 환율불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 원화가치 더 떨어질까=연말까지 경상수지 흑자분, 외국인 직접투자자금 등 약 50억달러 규모의 달러공급 요인이 있어 원화가치가 계속해 떨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떨어지는 속도 만큼이나 올라가는 속도도 빠를 것" (황성배 씨티은행 부지점장)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국계 투자은행인 샐러먼 스미스바니는 "연말까지 원화는 1천1백80원선으로 약세를 보이지만 내년에는 기업 구조조정이 착실히 진척될 경우 1천1백20원대까지 강세로 반전될 전망" 이라고 내다봤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